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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평범한 실존으로부터

해파리는 군집생활을 한다 (3) :  산호 

웹진 해파리는 생활권 확장 및 생태계 조성을 위해 외부 필진을 모셔오게 됐습니다. ଳ

산호 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실존으로부터,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미키 사토시, 2006)


산호 (할 말을 쓰고 그리는 비정규 만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아마 문명과 비슷한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숙고하고 의심하는 인간에게 있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납득하기 위한 물음이란 사명 내지는 운명이라는 확신이 도래하지 않는 한, 생애에 걸쳐 끝없이 반복될 보편의 질문이다. 다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며, 타인과의 비교 없이 그 기준을 세우기란 쉽지 않다. 타인의 총천연색 삶에 비해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듯 바래 보일 때, 일상의 평범함은 '특별하지 않음'으로 평가절하된다. 그러나 평범을 규정하는 시각이란 유동적이며, 비교 대상이 될 법한 평범한 날이 없다면 비범한 날도 없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평범에 비범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실험이다. 일상과 비일상을 가르는 황당한 전개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는, 주인공이 누구보다 평범한 여성이라는 지점이라는 데 있다. 스즈메는 삶의 각종 요소를 수치로 환산한다고 가정했을 때 거의 모든 영역에서 중간에 해당할 만큼 평범한 인물이다. 태어나 자라는 동안 큰 사건을 겪은 적도 없고, 이렇다 할 특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스즈메는 친구인 쿠자쿠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삶과 자신의 생활을 비교한다. 나의 삶은 지루하고 어중간하며, 남편이 해외로 출장을 가며 맡긴 거북에게 꼬박꼬박 먹이를 주는 일에도 염증이 난다. 스즈메는 비슷한 날들을 흘려보내며 하루하루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산다. 우연히 어느 계단참에서 손톱보다 작은 스파이 구인 글을 보기 전까지.


스즈메를 스파이로 고용한 부부는 스즈메에게 단 한 가지 지령을 내린다. 그것은 누구를 미행하는 것도, 국가기관에 잠입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다. 부부는 의심을 피하고자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스파이로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소양임을 강조한다. 그 후 스즈메의 평범하던 나날은 스파이의 소명을 다하기 위한 고난도 일상 사수 프로젝트가 된다. 살아가는 동안 뚜렷한 목표나 목적이 없었기에 평범했던 스즈메는, 이제 최선을 다해 평범해지려 노력한다. 그러나 의식하는 순간 그저 일상이던 선택들은 예삿일이 아니게 된다. 식당에서 직원이 기억하지 못할 만한 무난한 메뉴를 고르는 것조차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평범 속에 자신의 삶을 파묻으려 할수록, 되려 평범의 바깥으로 툭 떨어진다. 언덕도 늪도 없는 평지와 같은 모양새의 일상이란 크나 작으나 항상 일정 수준의 토목공사를 거쳐야만 영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이라 해도, 그것이 무사히 돌아가려면 수십 개의 톱니바퀴가 긴밀히 맞물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툭 불거져 나온 골에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마치는 하루는 귀하다. 그 하루가 모여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일일의 연속이 되는 것은 더욱 드물기에, 그저 의미 없는 날의 연속으로 여기기엔 아쉬운 것이다. 그러니 스즈메의 이상하리만치 평범한 날들은 스파이라는 전환점을 맞기 이전에도 이미 충분히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첩보 활동은 그것을 자각한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평범하고 흔한 것은 언제나 지닌 가치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아 왔다. 평범하기에 오히려 특별하다는 말이 범인(凡人)의 삶에 만족하고 살지어다 하고 속삭이는 위선의 문장처럼 들릴지라도, 모두의 삶이 각각의 색채로 아름답게 전시된 것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작금에는, 실로 삶의 모든 부분에서 평범함을 유지하는 것, 평균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란 수준급의 인생 운용 기술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말미에 다다라 쿠자쿠는 말한다. “나는 사실 스즈메의 애매함이 부러웠어. 이것저것 너무 많은 걸 하다 보면 살아가는 데 의미를 모르게 되어 버리니까.” 특별함이 개별 사건의 단위가 아니라 수십 번의 시퀀스로 연결되는 삶에는 자연적으로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을 수밖에 없다. 길을 헤매는 동안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 있을지언정, 차라리 헤매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렇게 일상의 궤도를 거북이의 속도로 나아가기로 선택해 지그시 들여다보는 순간, 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나날들은 조금 낯설고 다른 빛깔이 된다.


물에 투명하게 녹아든 채 일생을 부유하는 해파리의 삶보다는 북극해의 물살을 가르며 투레질하는 범고래의 삶이 더 눈에 띄는 것은 일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평범한 하루를 유지하는 해파리의 삶도 전쟁이다. 사냥하고 사냥당하지 않아야 오늘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니 전체 바다생물의 40%를 차지한다고 해서 그 모든 해파리가 살아가는 생을 평범하고 매우 흔한 무엇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실존주의의 영역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목적 없이 물속을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해파리의 실존에 무슨 본질과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해파리가 취할 행동 하나하나를 시스템에 입력해둔 절대자란 없으므로, 뇌도 심장도 없이 오로지 살아간다는 본능을 쥐고 생을 이어가는 강렬한 열망이야말로 해파리에게는 의미와 본질에 근접한 어느 지점일 것이다.


날 때부터 종착지가 정해진 인간은 없다. 개인은 매 순간 자유의지로 취하는 선택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가다듬어야 한다. 애초에 생에 부여된 의미란 없으므로, 그 텅 빈 본질의 그릇을 채워 넣으려는 무수한 도전과 사유의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을 완성한다. 결말에 이르러 일상 밖 미지의 영역에 스스로의 한 걸음을 내딛는 스즈메의 뒷모습은 여전히 평범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서린 빛을 더는 권태와 무료함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무엇이라고 정의되기를 요구하는 본질에 앞서, 스즈메를 낯선 곳으로 이끄는 것은 그의 실존하는 오늘이자 평범했던 어제다. 그 자신의 오롯한 한 걸음으로 스즈메는 자신의 선택에 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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