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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Sep 04.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마지막이면서 또 다른 시작

6월 20일 -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

드디어 산티아고. 분명 어깨도 다리도 아픈데 걷는 걸음이 하나도 무겁지 않은 이상한 날.


우린 짧아져가는 거리를 아쉬워하고 다가오는 산티아고에 설레어하다 금세 몬떼 도 고소(Monte do Gozo)에 도달했다.


맑은 날이면 산티아고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산티아고를 앞두고 하루 더 머무는 사람들도 많고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점들도 많다.

산티아고를 목전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노점 구경을 하기도 하면서 최대한 도착시간을 미뤄본다. 미룬다고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음에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쉬움을 떨쳐내고 산을 내려가니 ‘Santiago de Compostela’ 조형물이 우리를 반긴다.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꼬박 1년 만에 다시 찾은 산티아고는 여전히 활기 넘치고 아름다웠으며 즐거웠다.


프랑스 남매 순례자와 재회해 마지막 추억을 함께 했던 골목, 우연히 만난 한국인 순례자로부터 선물을 받았던 카페, 같은 알베르게에 머무는 순례자들과 뒤풀이를 했던 바르, 건립 800주년 기념증서를 발급해줬던 산프란시스코 성당(Iglesia de San Francisco), 드러누워 달을 보았던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잊을 수 없는 달콤한 추억들이 속속 떠오른다.


맥주 한 캔을 사들고 대성당 앞 광장에 앉았다. 멍하니 대성당 정문을 올려다보는데 벌써부터 감정이 벅차오르기 시작한다. 1년 전에는 오른쪽 사탑을 보수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왼쪽 사탑을 보수하고 있다. 보수공사로 대성당의 온전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가볍게 기념사진 몇 컷을 남기고 향한 곳은 순례자 사무소(Oficina de acogida al peregrino).


1년 전에는 코앞에 두고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는데, 그래도 한 번 와본 길이라고 이번에는 한 번에 찾았다.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도 한결같이 표정이 밝다. 하긴 기쁘지 아니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순례자 사무소는 북쪽 길, 은의 길, 포르투 길, 프랑스길. 걸어온 길은 모두 다르지만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축하하는 자리다. 약 한 달에 걸쳐 다다른 길에서 고작 1시간 정도 되는 기다림은 별로 길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기다림 끝에 산티아고 순례자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빰쁠로나부터 걸었기에 700㎞가 겨우 넘는 거리를 걸었을 뿐이지만, 내 이름이 적힌 증명서를 보고 있자니 어마어마한 성취감이 찾아왔다. 언제 우리가 이 먼 거리를 걸어왔는지, 걸어온 거리가 700㎞가 넘는다니……. 복잡 미묘하고 뒤숭숭한 기분은 처음 온 동행인도, 두 번 온 나도 마찬가지였다.


순례자 증명서를 받아 들고 우리는 다시 대성당을 찾았다. 산티아고상이 있는 재단과 산티아고의 유해가 모셔진 곳을 보기 위해서였다.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도착한 순례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산티아고상에 손을 짚고 기도를 하면 이뤄진다는 말도 있다.


산티아고상에 이어 유해 앞에 놓인 기도 의자에서 짧은 기도를 했다.


까미노를 걷는 내내 성당에 들를 때마다 기도를 해왔지만, 이곳에서의 기도는 왠지 더 신중하고 다소 무겁게 다가온다. 산티아고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은 아니다. 지나온 길만큼 쌓인 생각과 감정 때문이다.

까미노를 두고 인생과 닮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까미노의 종점인 산티아고는 인생의 어느 지점일까? 인생의 마지막, 임종의 순간과 비견할 수 있을까?


까미노의 끝인 산티아고가 죽음의 순간과 맞닿아있다는 결론에 다다르니 죽음이라는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우리의 까미노는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서쪽 끝인 피스떼라(Fisterra)가 남았고, 산티아고(야고보)와 성모 마리아의 전설이 내려오는 묵시아(Muxía)를 향한 여정이 또 남아있다.


산티아고는 까미노의 끝이지만 또 다른 까미노의 시작인 것이다. 죽음 역시 그렇지 않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삶의 마지막이면서 또 다른 시작.


우린 그 순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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