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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해정 Apr 10. 2018

동전 줍던 내가 지갑 없이 결제하기까지

돈의 맛, 돈의 미래 

지금은 '키즈카페'라 부르는 실내놀이터가 나 어릴 적에도 있었다. 지금 초등학교 5, 6학년들은 쳐다보지도 않겠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겨우 실내놀이터를 끊을 수 있었다.  


하루는 볼풀장에 파묻혀 헤엄을 치고 있는데 손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이 흥분되는 감촉! 동전이었다. 느낌이 딱 왔다. 나는 이리저리 바닥을 헤집어 동전 몇 개를 더 찾아냈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걸 까먹고 이리 뛰고 저리 뛴 아이들이 흘린 동전이 좀 있었던 것이다.


'땅 파면 돈이 나오냐'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나오던데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면 소싯적 철봉 좀 타신 분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박쥐마냥 철봉에 매달려 있는데, 흙 속에 반쯤 얼굴을 내밀고 있는 동전이 보였다. 나처럼 거꾸로 매달린 아이들이 떨어뜨린 동전이었다. 한강 시민공원에 있는 로프 정글짐에서도 아이들이, 어른들이 흘린 동전이 많았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동전을 줍는 일이 많았다.  


반짝이는 것을 잘 발견하는, 나는 전생에 까마귀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동전을 잘 주울 리 없다. 주변 사람들도 내가 돈을 잘 줍는다는 걸 알고 있다. 동전이 아니라 돈봉투도 주워봤다. 명동의 한 카페에서 실컷 수다를 떨고 일어나려는데 소파 밑에 봉투가 있었다. 지폐가 종류별로 잘 정리된, 딱 봐도 관광객의 것이었다.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 얼른 계산대에 맡기고 가게를 나왔다.


꽤 최근의 일은 지난 9월 다녀온 타이완 뤼다오에서다. 길에서 1000TWD, 우리 돈으로 약 3만7000원짜리 지폐를 주웠다. 크다면 큰돈인데 가게 앞도 아니고 그야말로 길바닥이라 그냥 가지기로 했다.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 화장실에 갔을 때도 돈을 주웠다. 세면대 밑에 동전 세 개가 떨어져 있었는데, 짐이 많아 부산했던 나는 내가 흘린 동전이라고 생각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나 집에 와서 보니 일본 돈이었다.  

            

타이완 타이퉁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도착하는 섬, 뤼다오. 화창한 바다와 하늘 그리고 떨어진 돈이 있다


거리에 돈이 보이지 않더라

한 5년 전부터 예전처럼 돈을 줍는 일이 뜸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키즈카페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철봉이나 정글짐에 매달려 있지도 않다. 차를 타니 걸어 다니는 일도 많이 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사람들이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 초반 청소년도 쓸 수 있는 체크카드가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신용카드가 과소비를 부추긴다는 말은 이제 꺼내기 민망할 정도로 신용카드 없는 사람이 없다. ‘OO페이’로 대변하는 핀테크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 것마저 거추장스럽게 만들었다. 휴대폰만으로 결제가 가능한 삼성페이는 정말이지 편리하다. 국가는 ‘현금 없는 사회’를 장려한다. 한국은행은 편의점에서 거스름돈을 교통카드 등에 충전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내놓기도 했는데, 애초에 현금을 내지 않으니 이 서비스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현금이 사라진 미래를 상상하는 건 너무나 쉽다. 무수히 많은 SF영화와 판타지 영화에서 그 사례를 보여준다.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선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결제되는 ‘동공 확인 결제 시스템’이 있다. <인타임>(2011)은 몸에 칩은 심으로 돈을 관리한다. <토르: 라그나로크>를 보았는지. 현상금 사냥꾼이 토르의 몸값을 요구하자 그랜드 마스터는 팔뚝의 버튼을 ‘띠, 띠’ 누른다. 그게 신체에 심은 칩인지, 웨어러블 디바이스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서 결제가 이뤄지고 토르는 팔렸다.


현실에서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정부의 친러시아 행보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그때 시위에 참가한 이가 시위대의 비트코인 지갑 계정을 QR코드로 만들어 피켓을 들고 다녔다. 그 장면이 전 세계 뉴스로 송출되었고 시위대를 응원하는 세계 사람들이 그 지갑으로 비트코인을 보내주었다. 당시 은행 업무가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비트코인은 더없이 좋은 후원 방법이었다. 한편 이 일로 ‘뜬 구름’ 같았던 암호화폐의 가치가 입증되기도 했다. (만약 그 시위대가 그 비트코인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면?! 상상의 가지가 여기서 더 뻗어나간다.)



돈의 모험을 좀더 떠나보자. 미래엔 아예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생길 수 있다. 앞서 말한 영화 <인타임>에서 돈은 시간이다. 시간이 많아 오래 사는 사람이 그 세계에서 말하는 부자다.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2006)에서는 똥이 곧 돈이다. 정부가 똥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실제 울산 유니스트에선 똥을 바이오에너지로 만드는 연구를 하는데, 그들이 만든 특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똥을 제공해준 대가로 학교 식당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를 제공한다.  


아예 돈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수도 있다.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의 경제적 배경은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물질의 풍요가 보장되면서 화폐를 쓸모없게 만든 미래다. 엔터프라이즈호 선장은 이렇게 말한다. "부의 축적은 더 이상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더 잘 살도록 하기 위해 일한다." 미래가 이런 유토피아로 나아가리란 법은 없지만, 다양한 색깔과 재능을 가진 선원이 돈이 아닌 인류 구원을 위해 우주로 향해 가는 게 우리의 미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도 겨울엔 현금이 있어야

이야기가 빙빙 돌았다. 어쨌거나 나는 예전만큼 돈을 줍지 못한다. 현금이 없는 사회, 나의 재주와 행운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여러분의 지갑엔 현금이 얼마나 있는가. 나의 경우 지폐를 몇 장 가지고 다니긴 하는데 쓸 일이 없고, 동전은 하나만 있는데, 마트에서 카트를 사용할 때 쓰는 용도다. 그래도 날이 추워지니 늘 삼천 원 정도는 가지고 다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뜨끈뜨끈한 어묵과 붕어빵, 호떡을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계란빵이다. 이건 정말 추워져야 만날 수 있는 간식이다.


맛있는 겨울 간식을 파는 노점에서는 아직 카드를 내미는 상황이 영 마땅찮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고, 거스름돈을 주고받는 일이 노점의 훈기만큼이나 정겹고 익숙한 풍경이다.


오래된 것은 늘 사라지는 법이다. 두툼했던 부모님의 월급봉투, 조금씩 모았던 돈으로 겨울밤 구세군 자선냄비에 기부하며 으쓱 하던 일, 꽉 찬 저금통, 계란빵 한 봉투를 사기 위해 삼천 원을 주섬주섬 꺼내던 일, 철봉에 매달려 있다 동전을 발견하고 친구들과 기뻐하는 일.... 모두 사라지겠지만 슬프진 않다.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빼곡히 채우고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기술이란 늘 그러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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