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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름 Jun 29. 2021

사랑하는 예술을 만든 이가 괴물일 때

풀기 어려운 딜레마



최근에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에게 어떤 영상을 추천해줬다. 마약 혐의로 입건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모 아티스트가 새로운 노래를 냈고, 그 뮤직비디오가 추천해 뜬 것이다. 별생각 없이 넘겼다. 유튜브에 그 영상이 7일 즘 떠있었을 때 그 영상을 클릭해봤다. 도대체 뭔 영상인지 보기나 하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노래가 좋았다. 어 노래가 좋네?라고 생각하고 알고리즘에 뜰 때마다 영상을 클릭해서 노래를 듣다가 결국에 그 아티스트가 새로 낸 음반 전체가 플레이리스트에 들어오게 되었다. 듣기 좋은 앨범이었다. 가사도 멜로디도 너무 취향에 잘 맞는 노래였다. 노래를 들으면서도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분명히 머리는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데 가슴은 노래에 정직하게 반응하니 듣고 싶은 노래는 질릴 때까지 들어야 하는 성미에 노래를 자꾸 듣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앨범은 누구의 프로듀싱도 맡기지 않고 본인이 쓰고 만든 노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예술과 창작자를 구분하여 볼 수 있을까? 본인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인데? 



예술을 소비할 때, 웬만하면 지키고 싶은 선이 있다. 성범죄를 저지른 아티스트의 노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비를 지양하고싶다. 나머지 물의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판단에 맡기겠다는 것이 내 신조인데, 이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많이 했지만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 전기가오리 3-4월호에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만든 이 가 괴물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책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고 전기가오리를 신청해 책을 받아봤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답이 책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책을 읽었는데, 결과는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다. 작자도 명확하게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방안을 제시해줬다. <가위손>의 조니 뎁의 가정폭력으로 인해 영화를 사랑한 경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따라가는데, 책이 제시한 방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a. 예술작품과 창작자를 분리하여 생각할 것. 


문제점: 예술작품과 창작자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 작품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많은 비평가들도 이를 완전히 분리해서 바라볼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점에 대한 대책: <가위손>의 주인공은 조니 뎁이지만, 영화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그의 노력뿐만 아니라 감독, 음향감독, 의상, 상대 배우, 각본가 등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이므로 최대한 조니 뎁에 대한 생각을 배제하고 그들의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자. 


나의 의문: 영화가 아니라 음악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특히나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만든 음악의 경우에는? 이 때는 예술과 창작자를 분리하여 생각하기가 불가능하지 않나?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b. 문제를 일으킨 시점부터 예술작품을 소비하지 말 것. 


영화의 경우에는 DVD를 구매하거나, 영화에 가서 보지 않는 식으로 불매를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책에서도 애매한 경계선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에 내가 이미 DVD를 가지고 있거나, 친구에게 영화를 빌려서 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도 소비의 일종에 들어가야 하는가?


나의 의문: 예술 작품을 소비하는 즉슨 창작자에게 인센티브가 가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의 경우에는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하는 것도 소비에 해당되는지, 배우나 감독에게 돈이 가는지 알 수 없으니 소비해도 괜찮나? 미술의 경우에는 내가 따라 그리고 싶은 그림이라면? 작가는 싫지만 그림은 좋다면? 모방도 소비에 해당되는가? 음악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요즘은 스트리밍 세상이기 때문에 한 번만 소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들을 때마다 창작자에게 인센티브가 가는 구조다. 노래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노래를 영영 듣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인가? 노래와 연루된 나의 추억도 같이 버려야 하는가?



c. 예술이 수용자에게 들어온 시점부터 창작자는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이 방법이 가장 먼저 제시된 방법이고, 이를 실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a를 제시한 것인데, 사실 나는 c를 약간 바꾼다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d. 예술작품은 수용자와 만났을 때 수용자의 것이 된다. 


수용자가 예술작품을 재창조한다는 말을 책에도 나오지만, 나는 예술작품은 수용자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든, 연주를 하든, 노래를 하든, 춤을 추든, 어떤 방식으로든 지켜보는 수용자가 있을 때 예술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용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야만 예술작품이 생명을 얻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오래 살아남은 예술작품, 어떤 클래식 음악이나 그림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수용자들이 해석하고 다시 창조해냈기 때문에 오랜 세월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반 고흐의 그림을 몇 세기 동안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까? 자본과 예술을 쉽게 융화되어 더 한 자본과 결부될수록 예술이 가치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숫자 상관없이 수용자가 예술을 재해석하고 소비하는 행위가 있어야만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술을 온전하게 수용자의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창작자와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범죄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끼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얼굴을 작품에서 만날 때도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온전하게 창작자에 대한 사랑으로 예술작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재해석한 경험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예술을 다시 찾는 것이라면, 그건 수용자인 나의 것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게 내가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가을방학의 멤버가 가을방학의 활동 종료를 알리면서 노래를 들으며 간직했던 경험은 오롯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어떤 예술작품이 나의 현실과 만나 하나의 기억이 되었다면, 그 기억과 감정은 창작자도 끼어들 수 없는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창작자가 문제를 일으켰는가. 셀 수도 없다. 창작자가 망쳐놓은 경험을 복구하는 것은 쉽지 않고, 다시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혹여나 다시 들여다보고 싶을 때 수용자가 죄책감을 가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잘못한 것은 수용자가 아니라 창작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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