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인플레이션과 환경
앨범 살 때마다 하는 고민이 있다. 이번에 몇 장 사지? 이번에 몇 장을 사야 원하는 포토카드를 다 얻을 수 있을까? 내 예산 안에서 몇 장을 사야 적절하게 잘 샀다고 소문이 날까? 이런 고민을 매번 한다. 물론 아이돌을 좋아하는 방식에 반드시 앨범을 사는 행위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 각자의 지갑 사정에 알맞은 덕질을 하면 된다. 아이돌에게는 음원차트만큼이나 중요한 수치가 있다. 앨범 판매량. 앨범 판매량은 흔히 초동과 총판으로 나뉜다. 초동은 앨범 발매 첫주에 팔린 앨범의 양이며, 팬덤의 구매 화력을 증명하는데 쓰인다. 총판은 앨범의 전체 판매량을 의미한다. 총판이 높으면 앨범 관련 상을 받는데 유리하고, 초동이 높다고 해서 어디서 트로피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덕후들은 어떻게든 초동을 많이 내려고 노력한다. 여러모로 아이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고, 이건 자존심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은 단순히 아이돌을 좋아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 팬덤 내 소속감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내 아이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생각일 테니, 마치 끝없는 달리기 경주처럼 누가누가 더 많이 팔았나 하는 것은 아이돌 덕후들의 자존심이 된다. 덕후가 아이돌의 얼굴이듯 아이돌은 덕후의 얼굴이기 때문에 성과를 내는 것은 묘한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적에 목매는 것은 건강한 방식이 아니다. 뭐든 적절해야 모두에게 이롭다.
이렇게 판매량 자체에 목숨을 걸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물론 존재한다. 나의 만족감을 위해서 앨범을 구매하는 건데, 이 때는 포토카드가 중요하다. 요즘 아이돌 앨범에는 대부분 랜덤 포토카드가 들어간다. 멤버 별로, 앨범의 버전 별로 포토카드가 다른데, 원하는 포토카드가 나올 때까지 앨범을 사는 경우도 있고, 예산 내에서 살 수 있을 만큼 산 다음에 초동기간 이후에 포토카드를 교환하기도 한다. 이 때 초동 기간 이후에 포토카드를 교환하는 것은 팬덤 내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최대한 초동 판매량을 많이 뽑는 것이 좋기 때문에, 구매를 독려하는 의미에서 생긴 규칙이다. 인당 앨범 구매량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고, 팬싸인회와 같은 행사가 추가되면 인당 앨범 구매량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예전과 같이 나 앨범 한 장 샀어 끝! 하는 구조가 될 수 없다. 현재 돌아가는 앨범 판매 시스템이 앨범이 많이 살 수 밖에 없도록 사람들을 유도한다. 그렇게 현재는 앨범 인플레이션 현상이 꽤 심각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필요해서 사는 앨범이 아니라 부가적인 것들 때문에 사는 앨범 양이 증가하여 남은 앨범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곤란한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다.
앨범을 만든 이들의 이름이 크레딧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 앨범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는지 고민도 된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앨범을 내 손으로 버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집에 둘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앨범을 활동 때마다 사다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앨범 부속품들을 버리게 되는 시점이 온다. 버전 별로 한 세트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처리하기 위해 분리수거를 하다 보면 별에별 생각이 든다. 내가 지구를 위해 몹쓸 짓을 한 게 아닌가? 이렇게 필요 없는 앨범을 사는 것은 환경파괴에 동조하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앨범을 안 살 수는 없잖아. 앨범을 사야 구매력이 증명되고 벌어들인 돈으로 아이돌의 다음 활동을 볼 수 있는 동력이 되는데 돈을 안 쓸 수는 없다. 포토카드만 따로 파는 걸 앨범으로 인정하는 세상이 언젠가는 올까. 듣지도 않는 씨디는 왜 이렇게 껴서 주는건지. 그렇다고 앨범에 씨디가 없을 수는 없잖아. 씨디가 없는 앨범을 발매한 모 가수는 앨범에 씨디가 없다는 이유로 앨범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앨범 하나에 사람 몇 명의 월급이 달려있고 가수의 커리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데 함부로 씨디를 없앨 도전을 하지 못하는 것이 겠거니 추측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앨범을 버릴 때마다 드는 환경에 대한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도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이 강해지면서 앨범을 버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터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많은 기업들이 환경친화적인 정책을 내세우는데 이상하게 시대의 흐름에 가장 민감한 소비자들이 모인 곳에서 낡은 생각을 바꾸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기업은 앨범의 가격을 올리고 싶어하고, 소비자는 가격에 맞는 구성품을 받기를 원한다. 포토카드와 같은 구성은 더 화려해지고 랜덤 구성품을 뽑기 위해서 소비자는 더 많은 앨범을 살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버려지는 앨범이 너무나도 아까운 자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기부도 한계가 있다. 원하지 않는 곳에 떨어진 앨범은 처치 곤란일 뿐이다. 그렇다고 구성품이 없는 앨범을 판매할 수도 없다. 앨범은 커리어를 상징하기 때문에 대충 만들 수도 없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아이돌이 환경 문제에 대해 입을 열 수 있는 환경이 될까? 그것도 미지수다.
고민하면 할 수록 혼돈으로 빠지는 이 문제는 일개 소비자인 내가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점진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앨범 가격을 내리고 구성품을 빼라거나, 앨범 없이 권리만 팔거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익과 결부된 산업이니까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섣불리 뭔가 제안하기 어렵지만, 스트리밍 시대인 현대에 맞게 씨디가 없는 앨범도 앨범으로 인정해준다면 플라스틱 소비는 줄어들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이에게 인터넷이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트리밍을 모두가 할 수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지만, 노트북에서 조차 씨디 플레이어를 없애며, 음악을 다운로드 받거나 플레이어로 재생하지 않고 스트리밍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에 아직까지 반드시 씨디가 들어있어야만 앨범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규칙을 정하는 쪽에서 한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많이 환경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필요하지만 또 필요 없는 앨범을 사는 행위 또한 앞으로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서 절충안을 만드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들이 절충안을 만들 때 까지 아이돌을 좋아하는 덕후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 아이돌은 덕후의 얼굴이 되는 것처럼 덕후 또한 아이돌의 얼굴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의 팬이라고 소명한 공간에서 발언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아이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그들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인 곳이니 괜히 얼굴을 먹칠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택한 방법은 내가 어디선가 지구를 파괴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휘말리면 그 다음에 지구를 지킬 수 있는 한 가지를 실천하는 것이다. 텀블러를 사용하거나, 음식을 포장할 때 일회용품을 빼달라고 말하는 것,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지양하는 것, 지구를 파괴하는 것들을 탐구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런 것들을 하지 말아야 되는구나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일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는 것들이 지구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행동에 한계가 있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다. 언젠가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그게 실행되는 시점도 분명히 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앨범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저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런 글을 쓰면서, 언젠가는 앨범을 만들 때 환경도 고려요소가 됐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