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해름 Mar 12. 2022

청춘이라는 말의 힘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고 난 뒤 짧은 단상

 


닳고 닳은 말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씩 입 밖에 냈을 만큼 닳은 말. '청춘'이라는 말이 그렇다.



사람들이 이 단어의 매력에 대해 토로했지만 얼마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단어의 퇴색됨에 대해 말한 적 있다.



푸를 청에 봄 춘 자를 쓰는 청춘은 한 때는 모든 이가 사랑했던 단어였다. 온데간데 청춘에 대해 노래하고 청춘 페스티벌도 열리고 좋을 때라며 이 시기에 대해 칭송하는 말이 떠돌았다.  



얼마 뒤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곧 사람들은 이 문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청춘은 더 이상 아름답기만 한 시기가 아니다. 사실 어느 시기에나 그랬을 것이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는 '시대가 꿈을 앗아갔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인 1997년에도 그러했고 지금 시대에도 어울리는 말이다. 시대는 청춘을 더 이상 아름답기만 하지 않은 시기로 만들었다. 청년 실업률은 높아지고, 청년들은 대학 때부터, 아니 사실 더 어렸을 때부터 취업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 좋은 대학을 나오고 그를 위해 투자하고 노력하고 경쟁하고. 요즘은 그런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이라는 말이 다시 색을 띠는 시기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더 이상 아름답지만 하지 않은 시기임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오히려 다시 이 단어에 매력을 느끼는 시기가 돌아오지 않았나 싶다. 왜냐면 최근에 가장 화제가 된 드라마의 배경이 모두 다 청춘의 한가운데였기 때문이다. '그해 우리는'이 그랬고 지금 '스물다섯, 스물 하나'가 그렇다. 한 여름으로 대표되는 청춘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담고 있는 이 두 드라마에 우리는 왜 이렇게 열광할까?



아마 청춘이라는 단어에 담긴 힘 때문일 것이다.

수도 없이 미디어에서 언급되면서 닳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단어에 담긴.. 어떤 알 수 없는 힘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보통 나의 청춘, 하면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는. 현실에서의 청춘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억이 걸러져서 기억하고 싶은 것들 위주로 남기 마련이다. 때문에 기억의 거름망을 타고 내려온  알맹이들을 묶어 '나의 청춘'이라고 명명하는  같다. 때문에 미디어에서 청춘의 표상을   자신의 찬란한 기억을 떠올리고, 하다못해 나의 첫사랑이라도 떠올리며 그때  좋았지,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랬다. 나의 청춘이 언제였나, 지금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미디어 속의 청춘을 바라보게 됐다.



우리는 청년기 아동기 유아기 이런 말은 종종 사용하지만 청춘기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특정 나이대를 청춘이라고 명명하기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청춘은 어느 시기나 될 수 있다. 나의 청춘은 언제일까. 소용돌이치는 현실의 가운데 내가 청춘의 조각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들은 무엇이 있나. 친구들의 청춘의 조각은 어떤 것일지도 궁금하다. 원래 항상 지금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금을 돌아보면 다 잊어버리고 좋았다는 말 밖에 하지 않나.



현실이 쉽지 않으니 청춘에 대한 찬양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푸른 봄에 열광하는지, 그렇다면 이 시대의 청춘은 어떤지,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단어의 의미가 퇴색된 과거가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에 담긴 힘이 시간이 지나도,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신기하다. 청춘이 뭐길래.

작가의 이전글 하반기의 다큐멘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