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 박사님은 회피형을 바꿀 수 있을까?
사과했잖아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거야?
회피형 인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순간까지 들었던 질문.
한때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이
회피형, 회피형 인간, 회피형 연애로
잠식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안정형도 불안형으로 만든다는
극악 난이도라는 말로만 듣던 그 회피형.
내가 그 회피형을 못 피했다고? 내가?
박수무당이라고 불릴 만큼 사람 파악이 빠른 내가?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어서였을까,
나는 어떻게든 그가 회피형이 아니라는 이유를
갖은 애를 써가며 찾아내고 또 찾아내는 것으로
내 연애의 대부분을 낭비했다.
주위에서 회피형이라면 이제 치를 떠는 꽤 많은 이들과
유튜브의 이른바 회피형 피해자 댓글들을 보면서
"아니 그걸 왜 못 걸러? 처음부터 티가 나지 않아?"
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박수무당이었기에
뼈아픈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죽었다 깨나도 회피형은 다신 안 만난다며
악에 받쳐 울던 친구에게
야 너 이런 마음이었구나.. 나 박수무당 이름표 뗄게..
라고 고백하고 싶었지만, 끝끝내 참았다.
난 정말 인정할 수 없었거든.
그 친구에게 그래도 한 가지는 말해주고 싶다.
그때 널 이해하지 못해서 벌 받은 건지,
나는 심리 상담 센터에 가서 상담까지 받았으니
너무 노여워 말라고.
너의 회피남 보다 더한 회피남을 만나 상담비 많이 날렸다고.
회피남과의 연애가 끝난 후
텅 빈 잔고와, 너덜너덜해진 정신머리로
나는 기어이 관계에 대해 찬찬히 복기를 시작했다.
성수동의 이자카야에서
맥주 한잔 하며, 소개팅을 하던 날.
사진과의 싱크로율이 99%에 수렴한다는 계산이
서로에게 끝난 후
적당한 호감 섞인 대화 중에
박수무당의 촉을 살짝 건드렸던 문장이 있었다.
"저는 연애하면서 싸운 적이 거의 없어요.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아 그래 겪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회피는 잘해도, 거짓말은 안 하더라.
그는 정말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해결도 하지 않았다.
그 차이를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늘 연애에서 치열하게 부딪혔고
그 싸움으로 인해 서로의 바닥을 보고
그 바닥마저 안을 수 있을 때여야만,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고 생각해 왔던
나의 연애관을 처음으로 흔들던 사람이었다.
다른 부모
다른 환경
다른 가치관 속에서 30년을 넘게 살아온 두 인간이
싸움 하나 없이 충돌 하나 없이
하하 호호 행복만 할 수 있다고?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둘 중 누군가가 입 다물고 있는 게 아님에도,
둘 중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놓고 있는 게 아님에도,
그게 가능하다고?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와의 연애가 시작되고
나는 모든 에너지를 그 연애에 쏟았다.
천년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냐고?
아니,
내 머릿속에 생긴 무수한 물음표에 대한 답을 찾느라.
자는 시간 제외하고, 내내 돌아가던 내 머릿속과 함께
나의 지피티도 과부하로 정신이 나가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가?
내가 예민한가?
문제라고 느끼는 내가 문제인가?
전 연애에서는 싸운 적이 없다는데, 그렇다면 내가 성질이 더러운가?
"이게 무야? 압빠 이게 모야아?"
말문이 막 트여서 하루 종일 질문하던 어린 시절보다도
더 간절하게 답을 구하던 날들이었다.
아 그땐 아빠가 답이라도 해줬는데.
아빠가 많이 보고 싶어 지던 연애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검열 수준이 과하게 높은
불안과 우울을 갖고 있는 박수무당에게
이젠 자기 의심이라는 파트까지 하나 더해졌다.
그의 사과가 있었기에 나는 더 오랜 시간 나를 의심했다.
연인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 온 내게
중요한 것은 '싸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풀어 나가는 '과정' 이었다.
그러나 회피남에게는 갈등의 발생 그 자체로
이 연애 = 문제로 입력되었다.
갈등이 발생했고, 나는 분명 상처를 받았는데
그의 대답은 늘 같았다.
미안해.
그런데 난 잘 모르겠어.
이런 걸로 싸워 보는 게 처음이야.
왜 그렇게까지 느끼는지 모르겠어.
싸우고 싶지 않아.
설명은 없었고, 변화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아무리 판단력이 좋은 사람도
결국 "아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나? 내가 이상한가?"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하게 된다.
상담 센터의 상담사는,
이것이 안정형마저 불안형으로 만드는 핵심 구조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 물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다.
돌아보면 박수무당도
긴가민가 할 만한 포인트들이 많았다.
갈등이 생기면 연락을 끊거나, 거리를 두거나
사과조차 하지 않고 동굴로 들어가 버리는
흔히들 말하는 전형적인 회피형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동굴로 숨지 않았고, 피하지 않았으며, 사과를 무척 잘했다.
그 성실한 사과들이 나의 눈을 흐렸다.
타인의 감정이나 괴로움에 대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아니 정확히는 부재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음에도
T 성향이 강해서 그렇겠지,
라고 나 스스로를 이해시키려 부단히도 애쓰던 매일이었다.
'이 사람도 노력하고 있구나'
'내가 조금만 더 이해하면 바뀌겠지'
하지만 그의 사과는 해결을 위한 고백이 아니라
눈앞의 갈등을 끄기 위한 일시적인 버튼에 불과했기에
같은 문제가 반복되었다.
나는 사과라는 숙제를 해치웠는데
왜 숙제 검사 완료 도장을 땅땅! 찍어주지 않냐는 듯한
그의 의아한 얼굴.
그 표정은 나를 더욱 말라가게 했다.
이 갈등은 왜 생겨났는지
그로 인해 생긴 나의 상처는 무엇인지
그 깊이가 얼만큼인지 그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짧지 않은 연애 기간 동안 그는
"너의 마음을 이해해. 너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었겠다"
라는 당연한 말을 단 한 번도 내게 해주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불편한 회피남은
'미안해' 라는 말로 매번 강제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 종료 버튼이 그의 지문으로 닳아갈 때쯤
그리고 박수무당의 정신과 약의 개수가
조금 더 늘어갈 때쯤
더 이상 버튼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의 당황은 이내 분노와 억울함으로 터진다.
사과했잖아.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는 그 순간에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말은 결코 질문이 아님을.
지금 네가 화내는 건 비상식적이며,
나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네가 입을 다물라는 정중한 협박임을.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탁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닳아버린 종료 버튼을 처음으로 눌렀다.
내가 왜 버튼을 눌렀는지
아마 너는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내가 오은영 박사님이었다면, 그를 이해시킬 수 있었을까?
나는 이해림의 금쪽 상담소를 매일 같이 오픈했음에도
겨우 심리상담사 자격증 따위로 회피의 늪을 이해하기엔 부족했던 걸까?
아 참, 내가 그 말을 못 해 줬네.
저어어기 건너 건너 아는 사람 중에
지독한 회피형 여자가 한 명 있거든?
둘이 싸움 없는 세상에서
평생 평온하게 살아가면 될 것 같은데 어때?
종료 버튼 주머니에 두둑이 챙겨놓는 건 잊지 말고.
혹시라도 소개 필요하면 연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