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려울수록 짧은 치마가 잘 팔린다는 말이 있다.
원단이 덜 들어가 저렴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어렸을 때 했고,
지금은 성적 매력을 돋보이기 위해서일 거라고 믿고 있다.
가진 게 없을수록 아름다움을 내세우게 된다.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외모에 공을 들이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화장이 짙어지고 명품을 찾게 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나는 나 자신과 친구들을 관찰하면서 그러한 경향을 읽어왔는데
최근에 알게 된 또래의 여자를 보면서 이 생각에 힘을 싣게 됐다.
아주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단순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
거기엔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해 줄 누군가를 붙잡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것이 읽힌 것은 아마도 나도 똑같은 의뭉스러움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장과 스타일에 점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건,
내가 어필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도 부끄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오늘 버트런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다가 들켜버렸다.
도덕적 타락과 경제적 무능엔 본능적인 미적 감각이 따라다니게 마련인데
그것은 언제나 테오그리토스의 미적 감각과 '헤스페리데스 동산'의 신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p.106
여기서 '본능적인 미적 감각'이란 것은
아름다움이 생계의 수단으로써 쓰인다는 뜻으로 읽힌다.
살아남기 위해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것, 그것 역시 본능이라니 무서운 생각도 든다.
가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인 잣대로 보자면 나는 무능하고 미래도 비전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하루하루 '본능적인 미적 감각'마저 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깝게 보일까 봐 짧은 치마도 못 입는 지경인 것이다.
어쩌겠나 싶다가도 어떡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