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리셔, 노가다의 굴레
책을 살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각자 따지는 요인이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저자와 저자의 신뢰성, 내용의 진정성, 나의 관심도가 가장 중요하다.
그다음으로는 제목과 표지 디자인, 목차의 흥미도와 도입부의 첫인상,
그리고 의외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텍스트 가독성이다.
그러니까 텍스트 편집 방식이 보기에 편하고 아름다우냐, 하는 것이다.
요즘 독립서점에서 유행하는 개인 출판의 경우
저자의 명성과 신뢰도는 책을 고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블라인드 면접' 같은 긴장감이 있는데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황에서 소비자는 오직 자신의 안목과 느낌과 취향만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무명의 작가들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났을 때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뿌듯함은 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립서점은 좁디좁고,
거기서 수십 권의 책들을 전부 읽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개인 출판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은 결국 제목과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보기에 예뻐야 하고 소유욕이 들게 만들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제목과 표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한글파일로 60페이지를 쓰는 동안 마땅한 제목을 찾지 못했고
내 디자인 감각이란 것은 내 초라한 패션 감각에서 매일 드러나고 있었기에
벌써부터 치욕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독립서점에 진열된 세련되고 감각적이고 힙하고 핫한 서적들 사이에서
감출 수 없는 촌빨을 뚝뚝 흘리며 썩어갈 내 책을 떠올리니까
'이거 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개인 출판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쓸데없이 센스 있는 건지,
무슨 글쟁이들이 그렇게 미적 감각도 좋으냔 말이야!
몇몇 독립서점에 들어가 남의 출판물을 염탐하면서 괜히 심술이 났다.
어쨌든 내가 표지에 손대는 순간 '폭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은 뻔한 일.
대략적인 이미지만 생각해두고 전문가의 손길에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제목을 정할 시간도 필요했기에,
그동안 인맥을 탈탈 털어서 주변에서 디자이너를 찾아보기로 결론을 내리고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역시 내가 잘 다룰 수 있는 것은 텍스트.
이제껏 많은 책들을 읽어오면서 텍스트 편집에 나름 보는 눈이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은 하룻강아지가 자기도 다 컸으니까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눈썰매를 끌 수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나로 말하자면, 일단 한글파일에 써둔 텍스트를
편집 프로그램으로 옮기는 기본적인 작업에서부터 버벅거렸다.
동생이 알려준 편집 프로그램은 마이크로 소프트의 'Publisher 2016'이었다.
나는 내 노트북에는 그런 편집 프로그램이 없다고 확신하며 도리질을 쳤는데
검색하니까 거짓말처럼 나타난 퍼블리셔 프로그램.
개인 출판하겠다고 시도하지 않았으면 내 노트북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영원히 몰랐을 것 같다.
이 프로그램은 책 편집이나 카탈로그를 만들 때 주로 쓰인다고는 하지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도 정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일반인들이 잘 쓰는 프로그램은 아닌 것 같았다.
기본 개념은 파워포인트와 유사해서 몇 번 이리저리 만져보니까 금방 손에 익었다.
파워포인트처럼 보기에 좋도록 이미지를 가지고 놀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텍스트를 옮기면 되는 것이기에 나는 마음을 편히 먹고 쉽게 덤볐던 것 같다.
하지만 그전에 포털 사이트에 이 프로그램에 대한 기본 정보가 더 많았다면,
내 동생이 나에게 좀 더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면,
그래서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꼭 알아야 했던 것들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시간을 허비해가며 '노가다'를 할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제 와 후회해봤자 어쩌겠는가.
그냥 나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노가다를 좋아하는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다.
일단 퍼블리셔를 열고 '페이지 디자인' 탭에서 크기를 정했다.
보통 독립 서적들은 일반서적보다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지는 추세라고 한다.
일반 책 사이즈로 하기에는 페이지가 적기도 하고,
책이 작고 얇고 귀여워야 소비자에게 쉽게 다다 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도 46판(B6) 사이즈를 선택했다.
사실 46판이라는 용어부터 낯설었다.
일반인들은 A4, A5, B5 같은 표현들이 익숙한데, 인쇄 용어들은 왠지 나에게 철벽부터 치는 느낌이랄까.
"인쇄 세계에 들어오려면 이 정도 용어는 알고 오셔야지."
이런 텃새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할까.
아무튼 모르는 사람이 배우는 게 맞는 자세인 것 같긴 하다.
일단 내가 알아야 나중에 아는 척이라도 하지.
책 콘셉트와 의도에 맞는 다양한 사이즈를 선택할 수 있지만
가장 대중적인 것은 46판과 A5 사이즈이다.
사실 나는 별 고민 없이 46판을 선택하긴 했지만
46판 사이즈가 왜 130mm*190mm가 아니라
애매하게 작은 128mm*188mm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고작 1-2mm 차이가 대수겠어?"
했다가 나중에 큰 코를 다친 나로서는,
정말 왜 딱 떨어지는 사이즈가 아니라 저렇게 묘한 차이를 두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지 아주 원통스러울 뿐이다.
아무튼, 퍼블리셔를 켜고 '페이지 디자인' 탭에서 '크기'를 설정해주는 것까진 무난했다.
안내선에 맞춰서 텍스트 상자를 열고 써두었던 텍스트 파일을 복사해서 붙여 넣기 하면 끝!
이라고 생각했는데, 텍스트가 자동적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고 뚝 잘렸다.
왜... 왜 자동적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는 건데?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봤지만 '퍼블리셔'에 대한 정보 자체가 부족했고,
동생도 그 부분을 잘 몰라서 헤맸다고 했다.
동생은 페이지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냥 각 페이지마다 텍스트 상자를 만들고,
앞 페이지에서 끊긴 부분부터 다시 뒷 페이지에 복사해서 붙여 넣기 했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지만,
나는 동생의 책 보다 4배나 많은 페이지 수를 가진 책이었고,
내용을 추가하거나 삭제해서 텍스트 변동이 있을 경우엔
그 수많은 페이지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는 끔찍한 뜻이었다.
몇 번이나 프로그램을 뒤지다가 못 찾았고
결국 동생이 하던 대로 각 페이지마다 텍스트 상자를 만들어 '복붙', '복붙'하는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한 20페이지쯤 갔을 때였나, 중간에 한 줄을 띄어야 하는 부분을 발견했고,
그렇다는 건 뒤에 있는 페이지들을 전부 수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씨......................."
당연히 시간은 새벽의 중간을 넘어서고 있었고 어깨는 결려왔다.
이건 아무래도 내가 생고생을 하고 있다는 강력한 느낌이 들었고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한참 동안 메뉴를 뒤진 결과 '연결 만들기'라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기능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두 시간 전에 잠들 수 있었을 것이고, 내가 포악해지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마우스를 쾅쾅 두들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했다시피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고,
이 4차 산업 시대엔 '컴알못'이 그냥 죄인인 것이다.
어쨌든 이 '슈퍼 기능'을 알게 된 후 작업 속도는 불붙은 듯이 빨라졌다.
중간중간 적당한 여백을 조정하는 여유도 생겼고,
글씨 폰트와 크기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도 있었다.
나는 나눔 명조 폰트를 선택했고 본문 폰트는 9로 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붙잡고 끝내고 싶었지만 내 본업에도 충실해야 했다.
일 하는 시간을 쪼개 하루에 두세 시간을 투자해서 3일 만에 본문 편집을 끝냈다.
맨 앞장에 저자 소개와 목차 등을 써넣으니 그럴듯했다.
조금 더 욕심을 냈다면 중간중간 일러스트를 넣어서 보기 좋게 했으면 좋으련만.
텍스트 편집을 끝내고 나니까 그런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편집을 끝내고 나니 160페이지가 나왔다.
독립 서적 치고는 꽤 많은 편이라고 한다.
왠지 뿌듯해져서 얼른 책이 나왔으면 싶었다.
마침 지인 중에 표지 디자인을 부탁했던 디자이너와 연락이 닿았다.
이제 표지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