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세 Sep 11. 2018

<피너츠>의 세계로 갈 거야

찰리 브라운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빌려준 책에서 섬뜩한 문장을 읽었다. 제기랄. 요새는 뭐가 이렇게 다 섬뜩한지 모르겠다. 갑자기 잡히는 약속도 섬뜩하고, 매주 방영되는 게 당연한 드라마의 회차가 벌써 그렇게 늘었다는 게 섬뜩하고, 옆구리에 붙은 살 한 줌이 섬뜩하고, 친구의 머리숱이 예전 같지 않은 것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때 섬뜩하다. 미리 예고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음악과 광고, 모든 가시 돋친 말들, 내가 생각해 놓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비웃으며 더 최악으로 치닫는 현실의 상황들. 십 대에는 너무 쉬웠던 세상이 이십 대에는 지루해졌다가 삼십 대에는 무섭게 변했다. 영화도 이렇게까지 장르가 바뀌진 않을 텐데.  


말을 뱅뱅 돌리지, 문장이 섬뜩해서 말하기가 싫은가 봐. 사실 별 문장 아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밑줄조차 치지 않았을 문장. 나에게만 날카롭게 돋을새김 되었던 문장.




끊임없이 자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네 성격 탓이야>




친구가 이 책을 빌려준 것은, 내가 요즘 '스누피'가 좋다고 해서였다. 책의 표지는 스누피 일동이 그려진 심플하고 귀여운 디자인이었고 제목을 봐도 가볍고 따뜻한 내용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요즘 별 것 아닌 걸로도 상처를 받으니까 받아들이기 전에 검열은 필수다. 귀여운 디자인에 가벼운 내용, 이 정도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다.



제기랄. 내가 귀여운 것에 약하다는 것과 귀여운 것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내가 언제나 잊고야 마는 사실, 표지도 광고일 뿐이라는 사실도! 아무튼 스누피의 귀여운 디자인으로 나를 낚은 이 책은 사실 심리치료사가 쓴 책으로, <피너츠>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성격을 분석한 책이다. 스누피의 디자인적인 귀여움을 사랑했을 뿐, 나는 스누피가 등장하는 만화 <피너츠>를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이 만화가 무턱대고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캡처들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피너츠>의 주인공들은 대놓고 모자라고 성격파탄이고 의지박약에 제정신이 아닌 인물들이라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을 책의 저자가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지적하는 것이 꼭 나를 향해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넌 감수성이 뛰어난 게 아니라 그냥 게으른 거야."


내가 애써 숨기고 싶어 했던 그걸, 스누피라는 귀여움을 앞세워 그렇게 잔인하게 말해야 했을까. 나는 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제대로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자격지심을 내가 뛰어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절충하곤 했다. 다른 것은 남들보다 부족할지 몰라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자의식은 뛰어나고 감수성도 좋고, 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위안했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건강한 사람은 평소에 자의식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신체 어느 부위를 다치면 그 부위를 유난히 의식하게 되는 것처럼 자의식도 항상 의식이 되면 문제가 있다는 논리. 얼굴이 화끈 거리고 열이 받는데 납득이 된다. 


자의식이 강해서 뭐. 머리가 무겁고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서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을 뿐이잖아. 내가 그렇게 따지니까 내가 할 말이 없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다. 나도 아무 자극도 받고 싶지 않다. 

여기저기서 광고가 튀어나오면 그런가 보다, 이번에 실패해도 다음엔 잘 되겠지, 계절이 바뀌는 것도 인간이 늙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우니까 그냥 받아들이면 돼, 그렇게.

내가 그런 우울한 생각들에 매번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뭔가 건설적인 행동을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일까?



그래도 이 책을 읽어서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나와 비슷하게 자존심 같은 것은 스누피한테 줘버린 찰리 브라운이 있다는 것이고, <피너츠>의 작가인 슐츠가 그런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것은 찰리 브라운 같은 인간상이 꽤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나만 이렇게 한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 거다. 



그래서 결론은?

<피너츠>를 주문했다.  작가인 슐츠가 나를 얼마나 콕콕 찌를지 벌써 걱정이 되긴 하지만 한심한 캐릭터들이 사는 세계에 좀 머무르고 싶다. 너무 똑똑하고 건설적인 인간들, 너무 열정적이고 뜨거운 인간들을 잠시만 멀리하고 싶다. 이런 게 바로 현실 도피고 게으르다는 거겠지. 

어쩌겠습니까. 책 한 권에 사람이 바뀌었다면 난 진작에 뭐라도 됐을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개인출판] 내가 알아서 책 낼게 신경 쓰지 마_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