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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un 20. 2016

지금이야, 파니 핑크

영화 <파니 핑크>


시간은 여자에게 더 가혹한 것 같아. 

스물다섯 살부터 때 지난 크리스마스 케익이다, 꺾인다 하는 불길한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나이가 얼마나 찬란한지 모르고 지내다가 문득 스물아홉을 맞게 된다. 

푸릇푸릇 물이 오른 스무 살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이십 대의 벼랑으로 내몰린다는 건 얼마나 처량한 일인지 모른다. 

다시는 남자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 할 것 같고

짧은 스커트를 입으면 욕먹을 것 같고, 애교라도 부리면 잡혀갈 것 같다.

그렇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정체성도 같이 흐려진다.

이제 나는 귀여운 이십 대 여자가 아니다. 그럼 아줌마인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도대체 나는 뭐지?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다가 울적해지고 일은 일대로 안 풀리고 돈은 돈대로 없고

주변에 나타난 이상한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심신이 지친 상태로 그렇게,

반드시 우울한 상태로 서른을 맞게 된다. 

독일 영화치곤 상당히 유머러스한 영화 <파니 핑크>의 파니 핑크처럼 말이다. 




<파니 핑크> 1994




파니는 나이 서른의 싱글. 

"여자가 서른 넘어서 결혼할 확률은 원자폭탄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믿고 있다. 

여자의 행복에 꼭 남자가 필요한 건 아니라면서도 좋은 남자를 찾기 위해 미신을 믿을 정도다. 

좋은 짝을 찾으려는 파니의 처절한 노력은 이해할 만 하지만,

파니의 주변 사람들이 혼자인 파니를 가여워하고 

더 늙기 전에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닦달하는 건 부분에선 나의 히스테리가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이미 결혼한 늙은이들이 싱글인 여자를 가만 두고 못 보는 건 똑같구나.

정작 자신도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할 수 없으면서 남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건 무슨 심보일까?

결혼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너도 당해 보라는 심정이라면 차라리 이해를 하겠다. 

그런데 그들은 영악한 게 아니라 걱정이 많은 거다. 

그들의 안타까운 표정엔 이렇게 쓰여있다.  "너 그러다 똥 된다. 쯧쯧쯧"



똥이 된다고. 

이 말처럼 삼십 대 미혼 여자의 마음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게 있을까.

엄마들은 딸이 서서히 허물어져 똥이 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서 이리저리 선을 알아보러 다니나 보다.

기껏 키워놓은 딸이 똥이 될까 봐.

그럼 이제까지 내가 쌓아온 수많은 영화, 책, 교양, 생각들 까지도 내 나이와 함께 똥이 되는 것일까.

내 모든 노력들이 변기에 모두 쏟아져 깨끗이 흘러내려 가는 걸 상상해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삼십 대 미혼 여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걸 상상해 본다.

남자들은 나이 들수록 멋스러운 미중년이 되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변비가 심해서였을까 점점 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거기에 휘둘리지 말자, 나도 매일 다짐한다.

결혼은 꼭 빨리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난 나이 들수록 멋있는 사람이 될 거야,

때가 되면 좋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나를 안타까워하는 기혼자들의 눈빛을 보면 다짐이 무너지고 말았는데

어제는 파니 핑크의 위로를 받게 되었다.

<인셉션>에 쓰였던 테마곡 <Non Je ne regrette rien>이 더 적절하게 쓰였다고 생각하는 

이 독특하고 섬세한 영화에서 말이다. 


죽음이 파니에게 말한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보면서 가. 죽음이 아무리 유혹해도 앞으로만 가.
그리고 시계는 보지마. 항상 몇 시인지 알리려 하니까.
항상 '지금'이란 시간만 가져.




우리가 우리 스스로 시간제한을 둘 필요가 없는데 '결혼'때문에 마음이 서두르려고 한다.

여자들의 시계는 이십 대에 맞춰져 있어서 그 시간이 지나면 속상 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늦지 않았다. 아무것도 후회할 것도 없다. 

지금의 내 나이가 줄 수 있는 적당한 아픔, 고유한 아름다움을 내가 먼저 사랑하고,

그걸 발견해 주는 남자를 만나는 게 딱 좋을 것 같다.



해피 서른! 그래도 초는 세개만 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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