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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un 25. 2016

혼자 하는 여행의 의미 (1)

영주로 - 낭만 기차의 멸종

장마 소식이 들렸다. 

날씨가 제때에 맞춰 장마전선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나는 별로 한 것도 없이 일 년의 절반을 보냈다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나도 자연의 일부라면 인생의 계획 같은 것이 DNA에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때가 되면 장마가 지고 어린 새들이 하늘을 날게 되는 것처럼, 나도 뭔가 자연의 비밀 같은 걸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너무 문명화된 탓인지 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겠다. 밥벌이 못 하는 건 물론이고 애인과의 관계도 아슬아슬했다. 내 평생 직업이거나, 내 결혼 상대가 될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슬아슬해도 괜찮은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장마의 전조로 하늘은 꾸물거리고, 함께 통영 여행을 계획했던 애인은 "너 집도 없고 차도 없잖아. 그런데 같이 살자는 거야?"라는 나의 독설에 그만 마음을 돌리고 말았다. 너무 기분이 멜랑꼴리 해서 심술을 부려본 건데 이미 애인의 얼굴엔 장마구름이 가득했고 난 그런 애인을 달랠 기분도 아니어서 그냥 나 혼자 무작정 여행을 가기로 했다.  



너 아니어도 난 혼자서 여행도 할 수 있는 여자다, 라는 걸 애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더불어 가족, 애인, 친구들에게 치이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여행을 만끽하고 싶기도 했다. 작년에 군산으로 떠났을 때도 혼자 여유를 부리는 여행을 꿈꿨지만 게스트 하우스에서 대학생 동생들과 친해져 버리는 바람에 다음날 단체 관광식으로 몰려다니게 되어 혼자만의 느긋한 여행을 못 한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이번엔 진정한 혼자만의 여행을 즐길 곳으로 영주를 선택했다. 그 유명한 무량수전과 요새 뜨고 있다는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가 있는 곳. 혹시 비가 쏟아진다고 하더라도 더 운치 있을 것 같았다. 



당차게 떠났지만, 역시 낭만은 낭만으로 있을 때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혼자 하는 여행은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일단 청량리 역에서 영주 역까지는 기차로 세 시간이 걸린다. 감옥에서 출소한 사람이 아닌 이상, 창밖을 보며 삼십 분 넘게 버티기는 쉽지가 않다. 아무리 시골 풍경이 아름답고, 목 없는 마네킹들이 허수아비처럼 서서 논밭을 지키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해도 결국에는 끝없는 녹음에 심드렁해져 버리고 만다. 어쩔 수 없이 책을 펼쳤지만 나는 엄청난 난시에 근시여서 금방 눈이 피곤해졌다. 정말 괴로운 것은 깜빡하고 이어폰을 두고 와 그 긴 시간 동안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듣고 싶은 노래는 머릿속을 맴도는데 가사가 잘 기억나지 않아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한 구간을 반복해서 부르다 보면 나중에는 그 거머리 같은 노래를 입에서 떼 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해진다. 나중에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떠올리며 셀린느가 처음 보는 남자를 따라 무작정 기차에서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루함이 한 몫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에단 호크처럼 매력적이진 않더라도 누군가 말을 걸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영주로 내려갈 때나 서울로 다시 올라올 때 그런 낭만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왜 우리나라 청년들은 이탈리아인 같은 뻔뻔함이 없을까 분통이 터졌다. 어딜 봐서 내가 거절할 것 같은 여자로 보이는지? 아니다, 그게 아니다. 우리 청년들이 숫기가 없거나, 내가 말을 걸고 싶을 만큼 예쁘지 않아서가 문제가 아니다. 기차에서 그런 낭만이 멸종했다는 것이 문제다. 오랜만에 타 본 기차는 낭만의 장소라기보다는 그저 이동수단에 불과했다. 그 따분하고 심드렁한 얼굴들. 



영주에 내려서는 그곳만의 색다른 분위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한눈에 봐도 노인의 비율이 압도적인 지역 같았는데 그 정겹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물어물어 부석사에 도착해 무량수전과 그 유명한 배흘림기둥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여행이 주는 기쁨에 한껏 고조돼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점차 기운이 빠졌다. 더운 날씨 탓도 있긴 했지만 겨우 부석사 한 곳만 둘러봤을 뿐인데 다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에 탔을 때는 거의 기진맥진 상태였다. 무섬마을로 가는 버스는 막차만 남아서 일단 들어가면 거기서 숙박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 남아 있던 기운마저 쭉 빠져버렸다. 무섬마을에 대한 미련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일단 어디든 들어가서 쉬고 싶은 생각에 영주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숙소는커녕 카페 조차 찾기 힘들었다. 급격한 체력 저하와 함께 기분도 울적해졌다. 벌써 저녁 여섯시. 이 낯선 곳에서 나는 혼자 뭘 하고 있는 거지? 막막함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겨웠던 영주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세계로 변해버린 듯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여기엔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그 사실이 갑자기 왜 그렇게 서럽게 느껴졌을까. 어떻게든 혼자 있고 싶었으면서 막상 혼자인 걸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 오니까 무서워졌다. 그러고 보니까 부석사에서 느꼈던 그 가느다란 허탈함, 그건 외로움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외로움을 덜 탄다고 생각해와서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영주가 쓸쓸해져서 안동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무량수전> 관련 글 하나라도 읽고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비포 선라이즈> 내가 꿈꾸던 낭만 기차.. 정말 멸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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