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세 Dec 04. 2016

나를 위해 더러운 곳을 남겨줘


개와 함께 산책하다가 자주 놀란다.

우리 개는 으슥하고 냄새나는 골목을 좋아하는데 그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면

내가 나도 모르게 사랑하고 있던 낡은 건물들이 허물어져 있을 때가 많다.

이렇게 부서져 벽돌과 먼지가 돼 버릴 것을 하루만 먼저 알았더라면

내가 오랫동안 그 건물의 낡음에 대해 무심했던 것을 사과하고

마지막 모습을 마음에 담기 위해 오래 서성였을 텐데.

예상하지 못했던 큼직한 허전함에 잠시 멍해진다.

밤이 되면 후미진 골목이 무서워서 서둘러 뛰어간 적도 있지만

그만큼 은밀하게 숨을 곳도 많이 내주던 골목이다.

용돈이 부족했던 고등학교 시절엔 첫사랑의 손을 잡고 

밤을 조금이라도 늘려보기 위해 골목길을 헤매던 기억도 있다.

그 골목에 아는 사람은 하나 없어도 골목 모퉁이마다 작은 기억들이 걸려있었다.

이렇게 사라진 낡은 집, 후미진 골목은 누가 기억해줄까.


모든 공간이 깨끗하고 세련되고 개방되어 간다.

이런 교과서 같은 단정함에 염증을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나에겐 후미지고 냄새나고 숨을 곳도 많고 싸우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 그런 공간도 필요하다.

최초의 생리혈이 묻은 팬티를 몰래 버릴 수 있는 곳,

사춘기의 호기심도 너그럽게 품어줄 수 있는 적당히 때가 묻은 곳.

그런 불경스럽지만 사랑스러운 공간들이 자꾸 사라져 간다. 

다들 괜찮은 걸까, 이렇게 잃게 되어도.


공간들이 너무 멋있어져서 더러운 나의 마음을 둘 곳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동체의 달콤함, 씁쓸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