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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an 21. 2017

비행기의 비상구 같은


제주도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야 하는 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나빴다. 

쌀알 같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다가 갑자기 병아리처럼 맑은 햇살이 나타나는 정신분열적인 하늘이었다. 

나중에서야 서울 사는 친구를 통해 그 날이 드라마 <도깨비>의 마지막 촬영을 하는 날이라

날씨가 그 모양이었다는, 어쩐지 묘하게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쩐지 날씨가 적당하더라. 이기적인 놈.


도깨비가 신부랑 결혼을 하든, 무로 돌아가서 총각무가 되든 

나는 결혼이냐 존재냐 하는 시시한 문제보다 더 큰 문제에 휩싸여 있었고 

그것 때문에 벌써 손바닥에 땀이 나고 머리가 아파서 호텔 조식도 제대로 먹지 못 했다.(호텔 조식에서 시리얼이라니!)

창밖에는 숨 쉬기도 힘들 정도의 눈보라가 불고 있고

서울에는 밤사이 10센티가 넘는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나의 커다란 철제 비행기가 중력을 거스르고 바람을 가르며 떠오르다가 

상공에서 휘청거리며 낙하하는 장면이 시리얼 그릇 위에서 아른거렸다. 

그때부터 내 비행기는 갖가지 끔찍한 방식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는데,

비행기가 막 이륙하자마자 폭발하는 건 너무 귀여운 상상이고

공중에서 비행기 뚜껑이 벗겨지며 내 살가죽도 함께 벗겨진다거나

천재지변의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려 말 그대로 고속 낙하하기 시작하는 비행기의 속도감,

그리고 사람들의 아비규환과 끔찍한 비명소리, 공포와 절망의 감정까지 생생하게 재현된다. 

특히 바닥에 곧장 충돌할 경우 내 다리와 척추에 가해질 고통을 상상하면

시리얼이든 뭐든 목으로 넘어가지도 않는다. 


내가 왜 제주도에 왔을까, 자책을 하면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 좌석에 앉았을 때도

창밖으로 불안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내 마지막을 예고하듯이... (불길한 예감은 왜... 그만)

잘 모르는 사람들과 떠났던 불편한 일정이었기에 이 공포를 발산할 수도 없어서 괴로웠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신나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어떻게든 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 했지만

내 모든 감각은 나를 왕따 시켜놓고 비행기의 모든 움직임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언제 이 시간이 지나갈까. 내가 그렇게 비행기의 엔진과 육중함 속에서 신음하며 시달리고 있을 때

나를 비참하게 하는 것은 옆좌석에서 태연하게 자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와 옆좌석에 앉아 있지만 안드로메다보다 멀리 있는 것 같은 그들.

내가 느끼는 이 고통을 한 순간도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은 그들.

그럴 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영원한 간격을 체감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상대방을 알 수 없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나의 공포심을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듯이

내 인생도 오롯이 혼자 살 수밖에 없다는, 비행 공포에 떨며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까마득한 상공, 어느 정도 비행기가 안정권에 진입하고 나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다리를 달달 떨고 있지만 그래도 음료수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주위를 두리번거릴 여유가 생겼을 때

눈에 "비상구"라는 안내판이 들어왔다.

그 옆에는 염치없고 알량한 화살표가 양옆으로 뻗어있고 그곳에는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은 출입문이 두 개. 

아직도 그 비상구를 발견했을 때의 허탈함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가망은 없지만 희망은 가져보자는 긍정주의자들의 뻔뻔함이랄까.

사람들에게 "힘내", "잘 될 거야" 같은 영혼 없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구름 위의 대한민국 어딘가를 비행하면서, 

전 세계의 유일하고도 외로운 비행공포증 환자가 되었다고 느낀 사람은 그렇게 꼬이기 마련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하고, 바퀴가 땅에 닿는 즉시 내 공포도 깨끗이 사라졌다. 

다음은 자신감의 시간. 

이번 비행은 생각보다 덜 무서웠고, 그렇게 진동이 크지도 않았네. 요즘은 저가 항공도 잘하네, 짜식들. 

이럴 줄 알았으면 불안에 떨지 말고 좀 여유롭게 창밖 구경도 하고 그럴걸.


독감에 시달렸다 일어난 사람처럼 축축하게 늘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앞으로 내 비행기 옆자리에 어떤 사람이 타면 좋을지 생각했다. 

나와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어서 함께 벌벌 떨어줄 사람이 타면 좋을까

비행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안심시켜줄 사람이 타면 좋을까.

당장은 후자가 좋다고 느껴지지만 결국 내 공포를 이해 못 하고 나를 한심해할지 모른다.

그냥 나를 한 주먹에 기절시켰다가 착륙 후에 깨어나게 해줄 프로주먹러나 

프로포폴 같은 것으로 기절시켜 줄 의사 양반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루하루 내 단점을 발견하고 그런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많지 않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사랑은 좋은 점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단점을 감싸주는 거라고 정의를 바꿨지만

나도 내 단점이 버거운 이 시점에 어디서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은 영원히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푸념해놓고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 모순 역시 나의 단점이고,

비행기에 그렇게 시달려 놓고 

마추픽추에 가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 것 역시 나의 단점.

진리를 알겠다 싶다가도 모르겠고 다 그렇고 그런 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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