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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an 23. 2017

망한 여행


"난 감기 같은 거 잘 안 걸려."

라고 말하면 바로 감기에 걸린다.

희한한 일이다. 


가기 싫은 워크샵을 제주도까지 끌려갔다가 감기를 얻어서 왔다. 

아무리 코를 풀어도 콧물이 한가득 리필되고 머리가 흔들리고 몸이 늘어진다. 

그 와중에도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잘 수 있겠다 싶었다.

서른이 넘고 보니까 핑계는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 대야 한다. 


그렇게 자리에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망친 여행'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에 미쳤다. 

도대체 여행을 망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일이 꼬여서 곤란하고 몸이 힘들었던 여행은 있었지만 

한 번도 망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오래 전에 태국 여행을 떠나 아름다운 바다에 몸을 던지기 직전, 

생리가 터진 걸 알고 서럽게 울었던 일도 지금 생각해보면 즐거운 에피소드가 되었다.

여행은 작정하고 망치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답고 즐거워지는 묘한 힘을 가져서

'여행'과 '망치다'는 낯선 조합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해서 정말 '망한' 일들이 얼마나 될까?

어떤 일이 아무리 끔찍하게 망했어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어떻게든 뒤처리를 하려고 애쓰고 

그러다보면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하기도 한다. 


희미한 어지러움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흥망성쇠의 어디 쯤일까 가늠해본다.

줄곧 '망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나는 아직 망하고 흥하고를 결론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냥 앞으로 나의 흥망이 순조롭고 리드미컬해서 

가끔 울고 가끔 웃으며 조금씩 늙어가고 싶다. 


이것봐, 감기에 걸려서 온종일 누워있으니까 이런 생각도 하는 거지.

결국 긍정적인 사람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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