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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an 28. 2017

우리의 '살갗 닿기'

뜬금없는 스킨십 예찬


'스킨십'은 우리말로 '만지는 것', '살갗 닿기', '피부 접촉' 같은 어색한 말로 번역된다. 그만큼 우리 문화가 스킨십에 보수적이라는 거겠지. 어렸을 땐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테니까 어른들의 뽀뽀나 포옹을 많이 받았겠지만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내 몫의 스킨십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머리가 크면서 스킨십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해서(왜 그랬을까..) 딱히 서운하지도 않았다. 내가 알건 다 아는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나는 장난으로 잠든 척을 하고 있었고,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덮어주면서 내 볼에 뽀뽀를 하고 나간 적이 있다. 한편으로는 엄마의 사랑에 감동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나한테 뽀뽀를 해?'하는 황당함과 부끄러움으로 계속 잠든 척을 하다가 그대로 쭉 자버렸고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창피하니까.



도대체 왜 스킨십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자라게 된 걸까?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던 성교육 시간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반드시 내 무관심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듯이 일부러 하품을 크게 하며 관심 없는 척하는 것이 여학생들의 일관된 태도였는데, 몸이 2차 성징에 접어들며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상황에서 가슴이 커지는 것도 부끄럽고 여기저기 새로운 털이 자라는 것도 부끄럽고 생리대를 사러 마트에 가는 것도 부끄러운, 그냥 몸에 관한 것이라면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 지경의 사춘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겉으로는 감추고 숨기기 바빴지만, 어른들이 없는 친구 집에 모여 집을 뒤지면 반드시 있기 마련인 야한 비디오를 틀어놓고 번갈아 창문 밖을 망보면서 호기심을 폭발시키곤 했다. 미칠듯한 긴장감 속에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후텁지근한 열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영혼 어딘가가 간질간질하다가 죄책감으로 덮쳐오던 그 늦은 오후. 결국 지레 겁을 먹은 집주인 친구는 비디오 속 남녀가 본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 안 할래!'를 외쳤다. 소심한 년.



이성에 대한 욕구는 소녀도 소년 못지않다. 하지만 소년들처럼 자기 스스로(!) 욕구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몸이 소년들만큼 단순하지 않은 탓에 '자기 몸 설명서'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소녀들의 욕구는 자꾸만 감춰지고, 그로 인해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긴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이렇게나 오랫동안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오랫동안 '첫사랑'을 좋아했고 나의 순결한 첫사랑을 '성욕'이나 '욕구'같은 불경스러운 것들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순수한 여고생이었던 나는 정신적 사랑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당연히 내 첫사랑도 나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한 사람일 줄 알았다. 다른 변태소년들과는 다른, 좀 더 지적이고 고상한 나의 남자니까. 그런데 어느 사춘기가 절정에 달한 밤, 첫사랑은 내게 키스를 요구했고 나는 (개)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건 우리의 순결한 사랑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 순간 그렇게 사랑하던 첫사랑의 삐죽 내민 입술이 얼마나 불경하고 혐오스럽게 보였는지 모른다. 몇 번 시도했지만 나는 뽀뽀도 한번 하지 못 하고 돌아섰고, 우리는 얼마 뒤 헤어지고 말았다.


그 시절의 나를 지금 만난다면 죽여버리고 싶다... 그게 뭐라고! 설마 그 남자애가 끈적하고 농밀한 이상한 키스를 원했을까? 그냥 걔가 원한 것도 겨우 뽀뽀 정도였을 것이다. 정말 두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마는 뽀뽀. 근데 나는 왜 거기서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그 남자애를 실망시키고,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는가. 그때 만약에 자연스럽게 뽀뽀했다면(라라랜드 시발 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겠지만 그만큼 더 친해졌을 거고, 조금 더 오래 사귀었을 거고, 내 첫사랑과 내 친구가 늦은 밤 친구의 집에서 함께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쁜 놈.



뽀뽀가 얼마나 귀여운 스킨십인가. 촉촉하고 도톰한 입술들이 가볍게 부딪치며 서로의 온도와 부드러움을 나눈다. 아무데서나 거리낌 없이 나누는 습관적인 뽀뽀는 항상 좋다. 연인들이 공공장소에서 나누는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뽀뽀, 그리고 뒤늦게 주위를 의식하며 수줍게 웃는 건 더욱 좋다. 입술끼리의 뽀뽀만큼 신체 어느 부위건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는 뽀뽀도 좋다. 신체 각 부위의 촉감을 색다르게 느낄 수도 있고, 신체의 어느 부위냐에 따라 뽀뽀의 '귀여움'이 자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니까. 어쨌든 입술이라는 극단적으로 부드럽고 촉촉하고 따뜻한 부위만 있다면, 춥!하고 맛있는 소리를 낼 수 있다...




내가 구정을 앞둔 이런 경건한 시간에 스킨십을 예찬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차례에 올릴 음식을 모두 만들고 녹초가 되었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주 따뜻하고 믿음직한 손길. 내 손을 잡아 줘도 좋고 머리를 쓰다듬어 줘도 좋고, 내가 잠들 때까지 등을 도닥여줘도 좋을 것 같다. 아주 간단한 행동인데 아무에게도 부탁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조금 생각이 많아졌다. 가족이 그렇게 해주면(...) 불쾌해질 것 같고, 친구들에게 부탁하면 나를 불쾌해할 것 같고. 결국 애인들이 맡아야 할 역할인 것이다. 

스킨십이 필요하다는 건 외롭다는 말이고, 누군가의 사랑, 누군가의 관심, 누군가의 위로받고 기대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내 생일이나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 더 외로워지는 사람이라서 '구정 전야'에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나 싶다. 곁에 가족도 없는 외로운 명절을 보내야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신체 모든 부위에 대한 스킨십을 농밀하게 쓰자고, <그레이의 50가지 스킨십> 같은 당찬 글을 쓰자고 노트북을 열었건만, 겨우 '뽀뽀'를 썼더니 마음이 녹아내려버렸다. 나는 겨우 그 정도의 사랑과 위로가 담긴 잠깐의 부딪침이면 되는데. 하지만 입술만큼 멀고 먼 곳이 어디에 있나. 나는 첫사랑의 입술과 14년 멀어져 버렸다. 내 첫사랑도 지금의 나처럼 잠깐의 사랑과 위로를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미안해진다. 그 나이의 수줍은 소년한텐 정말 큰 용기를 내서 한 말일 텐데.  

 

그래서 말인데 새해에는 조금 더 스킨십에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나쁘고 불경한 스킨십 말고, 따뜻하고 사랑이 담긴 스킨십. 그런 측면에서 오늘 밤은 '내 생에 최고의 스킨십'은 무얼까 후보를 올려보고 그중 하나에 '황금사자상'을 주며 셀프로 축하해주어야겠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재개봉.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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