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세 May 27. 2017

세 번째 만남

클럽에서 만난 남자였다.

다들 그럴 때가 있지 않을까. 가족이고 뭐고, 일이나 미래나 통장 같은 거 다 내 알바가 아니고

앞으로 견뎌야 하는 인생이 짐짝처럼 무거워서 던져버리고 싶을 때.

이걸 클럽에 간 변명이라고 늘어놓으면서 여기에서도 나를 보호하려는 내가 우습다.

클럽에 간 게 뭐 잘못한 일인가. 근데 왜 나 변명해야 할 것 같지.

믿지 않겠지만 진짜 오랜만에 간 거라고.



세 번째 만났을 때였다.

첫 번째는 클럽에서 꼬시고 미느라 바빠서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틈도 없었고

두 번째는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보다 귀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남자는 막걸리 네 병을 마시고 나랑 나누었던 대화를 통으로 날려버렸다.

심각한 이야기도 꽤 나누었는데, 다음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나 혼자 벽에 대고 떠든 것 같은 피곤함과 허탈함에 마음이 미묘했다. 

나는 이 사람을 어느 정도 알게 됐는데, 상대방한테 나는 백지였다.

나한테 자꾸만 

"그래서 내가 뭐라고 대답했어?"

라고 묻는 사람한테 이유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애초에 클럽에서 만난 사람한테 나는 뭘 기대한 걸까.

그 날은 비가 왔고, 나름 날씨에 맞춰서 막걸리에 파전으로 하자고 의기투합했고,

슬프게 끝난 그의 이전 연애담을 들으면서 나는 조금 너의 의리에 감동했고,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더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전날 저녁에는 비가 그렇게 오더니 아침에는 맑게 개어 있었다.

불과 삼 일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사람과 낭만적으로 술을 마셨던 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세 번째 만났을 때는 확연한 어색함을 느꼈다.

술이 아니고 저녁을 먹는 자리여서 그랬을까.

같이 거리를 걸을 때에도 이상하게 낯설고 불편한 느낌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나는 자꾸만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고 그럴수록 어색함만 커지고 있었다.

클럽에서는 클럽의 흥이 있었고, 술집에서는 비와 술이 있었는데

이제 우리 둘 사이를 이어 줄 마법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같이 약을 맞고 취해있다가 현실에서 깨어난 두 사람.

나는 씁쓸해진 마음을 감추고 자꾸 그를 웃게 만들고 싶었다.

그 남자까지 이 어색함을 인정하게 되면 견딜 수 없이 울적해질 것 같았다.

나란 사람은 그 원인을 자꾸 스스로에게서 찾게 되기 때문인데,

음악이나 술이 아니면 이렇게 어색해질 정도로 나는 매력 없는 여자인가,

그런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가기 위해 그 남자의 차에 앉아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이런저런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래퍼 이름을 대면서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외계어 같은 이상한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그 남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 래퍼는 정신병자인데 그래서인지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는 거다. 

나는 즉시 궁금했고 들어보자고 했다.

남자는 이상하고 무서울 텐데 괜찮겠다고 재차 물으면서 노래를 틀었다.

늦은 밤, 인적이 없는 뚝섬 한강 공원이었고, 

나는 아직 생김새도 잘 익지 않은 낯선 남자와 둘이 차 안에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과연 묘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를 잘 들어봐."

그 래퍼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기분이 나빴다.

몸에 철썩철썩 감기는 축축한 파충류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목소리를 견디면서 내용에 집중하는데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 화자는, 오랜만에 여자 동창한테 술 한잔 하자는 제안을 받고 나간다.

둘이 술을 마시다가 눈이 맞아 모텔로 직행해 관계를 갖게 됐는데,

마침 남자의 여자 친구에게 장문의 문자가 온다.

여자 친구를 속이고 다른 여자와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남자는 

여자 친구의 문자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확인하게 되는데

문자의 내용은 여자 친구가 어제 본 무서운 영화에 대한 것이다.

영화 속 남자는 여자 친구를 속이고 다른 여자와 모텔에 가게 되는 데

그걸 우연히 목격한 여자 친구가 망치를 들고 쫓아가 남녀를 모두 살해한다는 영화 내용.

모두 현실의 내용과 일치하고, 영화와 똑같은 시간에 현실의 모텔에도 초인종이 울리면서

불륜을 저지른 남녀가 살해될 거라는 암시를 주면서 노래는 끝이 난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서, 나는 점점 무서워졌다.

도대체 클럽에서 만난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 노래를 나에게 들려주는 걸까.

나는 노래 속의 남자 화자가 여자를 '반찬'에 비유하면서 함부로 하는 부분에서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운전석에 앉은 이 남자가 어디선가 망치를 꺼내서

함부로 클럽에 나다니는 나 같은 여자를 단죄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노래가 후반부로 가면서 끔찍한 결말이 예상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반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안전하게 나가게 되면, 다시는 일탈 같은 거 하지 않을 거라고.

잘 모르는 남자와 술을 마시고 같이 차에 타지도 않을 거라고.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아프고,

차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지 확인하고 

그러는 사이에 노래가 끝이 났다.

내 옆에 앉은 남자가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진짜 무섭지?"


그러면서 밝은 톤의 다른 노래를 틀었다.

그 남자가 무서워하는 것은 노래 안에 있었고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같은 현실 안에 있었다. 


그런데 더 울적한 것은,

내가 지금 얼마나 무서운 감정을 느꼈는지 그 남자에게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 번밖에 만나지 않은 그저 그런 사이이므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의지할 수도 없었다.

나는 무서움을 꾹꾹 숨기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자려고 누웠는데 엄청난 외로움이 몰려왔다.


나 정말 무서웠다고, 그걸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날씨가 좋으면 이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