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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un 10. 2017

뱀파이어가 아닐까 생각했어




날씨 좋은 휴일 오후를 몽땅 보내고 

허전한 마음으로 밤을 기다리고 있으면

하루의 숨이 넘어가는 곳에서

그의 연락이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그는

오늘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는 투로 술을 마셨다.

외출하지 않아도 여행가지 않아도

인생의 중요한 것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네가 자꾸 밤에만 부르니까 혹시 뱀파이어가 아닐까 생각했어.



저녁과 밤 그리고 새벽에만 있었던 우리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아주 잠깐 해 보았던 공상이었다. 



너는 소녀 같은 데가 있구나. 나는 때가 타버렸는데.



그는 자조했지만

나는 소녀 같다는 말에서 무시를 읽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해리포터도, 반지의 제왕도, 아이언맨도 안 봤다는 그에게

뱀파이어를 들먹이는 내가 얼마나 우스워보였을까 싶었다.


이렇게 우스워보이는 느낌이 너무 불쾌했다.

오늘 얼마나 햇살이 좋았는데

그걸 다 놓치고 밤에 찾아와서 술이나 먹자는 주제에.

해리가 얼마나 질풍노도인지, 프로도가 얼마나 심약한지

토니가 얼마나 복합적인 인물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진짜 뱀파이어를 바랐던 게 아니라

내 시답잖은 농담에

맞아, 요새는 인간 피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하고 시답잖게 되받아 쳐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비현실을 믿지 않으면서 현실에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비현실을 믿으면서 그것이 비현실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내가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벤저스를 보다가 재미가 없어서 극장을 나왔다는 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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