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은 휴일 오후를 몽땅 보내고
허전한 마음으로 밤을 기다리고 있으면
하루의 숨이 넘어가는 곳에서
그의 연락이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그는
오늘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는 투로 술을 마셨다.
외출하지 않아도 여행가지 않아도
인생의 중요한 것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네가 자꾸 밤에만 부르니까 혹시 뱀파이어가 아닐까 생각했어.
저녁과 밤 그리고 새벽에만 있었던 우리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아주 잠깐 해 보았던 공상이었다.
너는 소녀 같은 데가 있구나. 나는 때가 타버렸는데.
그는 자조했지만
나는 소녀 같다는 말에서 무시를 읽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해리포터도, 반지의 제왕도, 아이언맨도 안 봤다는 그에게
뱀파이어를 들먹이는 내가 얼마나 우스워보였을까 싶었다.
이렇게 우스워보이는 느낌이 너무 불쾌했다.
오늘 얼마나 햇살이 좋았는데
그걸 다 놓치고 밤에 찾아와서 술이나 먹자는 주제에.
해리가 얼마나 질풍노도인지, 프로도가 얼마나 심약한지
토니가 얼마나 복합적인 인물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진짜 뱀파이어를 바랐던 게 아니라
내 시답잖은 농담에
맞아, 요새는 인간 피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하고 시답잖게 되받아 쳐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비현실을 믿지 않으면서 현실에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비현실을 믿으면서 그것이 비현실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내가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벤저스를 보다가 재미가 없어서 극장을 나왔다는 건,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