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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un 14. 2017

계약은 처음이지


6개월 동안 드라마 제작사에서 작가로 활동했다.

신인 작가를 데뷔시키려는 국가사업의 일환이어서 

월급을 받아도 부담이 덜했다.

역시 나랏돈은 꿀맛이라면서.


사업이 끝나자 좀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고

6-7월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로 했다.

어쨌든 글 쓰느라 본의 아니게 차곡차곡 모아둔 나랏돈을 

모두 탕진해버리고 싶었던 거다.

그러면서 차근차근 다음 플랜을 생각해보기로.


그런데 드라마 제작사 측에서 계약을 제안해왔고

신인 작가인 나에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런 말이 괜히 나왔을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회사에서 계약서 초안을 보내주었고

정말 형식적이고 딱딱한 계약서를 읽는데 

자꾸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겁먹지 말라고.

다들 이런 복잡한 서류를 읽고 이해하는 척 동의하고 사인하고,

어른인 척하면서 사는 거라고.

이 계약이 노예 계약이 되어서 

앞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와 갈등과 패배, 좌절이 있겠지만

거기에도 끝은 있을 거라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나 솔직히 너무 걱정되고 겁나고 그래.

뭘 믿고 나하고 계약하는 거야, 이 회사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해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 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잠깐만 진지하게 생각하면

지옥의 하데스가 나를 끝도 없이 아래로 끌고 간다. 

그래, 나 원래 자존감 낮은 인간.

대기업에서 계약하자고 달려들어도 

"왜 나를..?" 이라면서 걱정부터 할 인간.


근데 어제 동생이 그랬다.

내 동생은 요즘에 프로듀스 101에 홀랑 빠져있는데,

새벽까지 관련 영상을 보면서 연신 신기하다고 중얼거린다.


"정말 신기하다. 

끔찍하게 못 하던 애들도 자신감이 붙으면 신기하게 잘하고 심지어 잘 생겨져."


나도 알아. 

모든 일은 자신감의 문제라는 거.

나도 그걸 어디서 판다면 내 쌈짓돈을 털어서라도 사고 싶은 심정이야.

지금은 자신감이 보이지 않지만

막상 계약을 하고 나서, 계약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회사 시스템에 적응하고 나면 

조금씩 자신감이 붙겠지.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도망가지 않는 거다.

이렇게 여기다 쓸데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라도

내가 도망가지 않게 다독여 주어야 해.

잘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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