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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Jul 05. 2017

흥하고 망하는 그 사이


내 인생은 왜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는 거냐고 투덜거려 왔지만 생각해보면 앞이 캄캄한 걸로 따지면 우리 엄마 아빠도 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자영업이 말처럼 쉬운가. 우리 집은 자랑스러운 치킨집 1세대로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손님들의 치킨 부스러기를 훔쳐 먹으면서 자랐다. 다행히 그때만 해도 치킨을 이렇게 신봉하던 때가 아니어서 한 동네에 치킨집은 서너 개에 불과했고, 그래서 그럭저럭 생계도 유지하고 그 와중에 자식도 셋이나 낳고 당시에 팔백만 원이었다는 집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가 치킨을 튀긴다는 게 자랑스럽진 않더라도 부끄럽지는 않았는데, 머리가 크면서 '너네 집 뭐하냐'는 질문에 우물쭈물하게 됐다. 유난히 배달 요청이 많은 주말에는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배달을 가기도 했는데,  거기서 동창이라도 마주치면 돈을 내미는 그 애도, 맛있게 드세요 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 나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슬슬 되바라지던 시절, 우리 치킨집이 있던 동네 시장은 근처에 들어선 대형 마트의 영향으로 쓸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폐장 직전의 놀이공원처럼 을씨년스럽게 뭔가가 굴러다니고, 문을 닫는 집들이 늘어갔다. 점차 허물어져가는 삶의 터전을 보면서 우리 엄마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 엄마 아빠는 맨날 열 시에 닫던 문을 삼십 분쯤 일찍 닫아도 되는 걸까를 의논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불안했을까. 자식 셋은 쑥쑥 자라고 손님은 줄어들고, 여기저기 맥도날드니 그런 것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였다.


다른 먹고 살 거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위기감에 잠 못 들었을 것이다. 예전부터 좀 낭만적인 데가 있었던 우리 아빠는 어디서 만화방이 뜬다는 이야기를 듣고 옆동네 만화방을 덜켝 계약해버렸다. 나는 철없이 친구들을 우르르 데려가서 라면도 끓여먹고 밤새서 만화책도 보고 마냥 좋았다. 치킨집보다는 그래도 조용하고 넓고 깔끔한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치킨만 튀긴 우리 아빠에게 갑자기 만화방 운영은 생소하고 피로한 일이었다. 만화방만으로는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웠다.


무려 일곱 식구다. 할머니 할아버지에 자식 셋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르겠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직 엄마 아빠가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 우리 치킨집이 있던 동네 시장은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딱히 다음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가족 전원이 '백수'가 되었다. 그때는 엄마 아빠가 맨날 집에만 있어서 어린 마음에 좋았는데, 사실은 얼마나 속이 타고 기가 막힌 상황이었을까.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막막했을까. 엄마 아빠는 만화방, 오락실, 보드게임방 등으로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치킨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직종을 찾아낸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엄마 아빠는 대학가에서 메뉴가 70개 가까이 되는 호프를 시작했다. 


과연 15년 전의 대학생들을 술을 많이도 마셨다. 취업문제가 요즘처럼 심각하지도 않았고, 아직 '먹고 대학생'이라는 본분에 충실해서 새벽까지 부어라 마셔라 놀자판이었다. 게다가 요즘처럼 맛집이 많은 편도 아니어서 주머니 가벼운 대학생들은 밤만 되면 호프 같은 데에 모여서 이것저것 안주를 시키고 그랬던 것이다. 생각보다 우리 호프가 잘 되어서 한 때는 나도 주말마다 불려 나가서 서빙을 도와야 했다. 사장 딸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때 한두 살 많은 알바생 언니들한테 얼마나 눈치가 보이던지. 몸은 고됐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매출을 확인하면서 흐뭇해하는,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일을 엄마 아빠는 여전히 하고 있다. 그 후로 그런 퓨전 호프집들이 엄청나게 많아졌고, 술집이며 밥집이며 다양해졌고, 사람들은 각자의 사장으로 술을 진탕 마시는 것을 자제했다. 이런저런 필연적인 이유들로 우리 가게의 매출은 서서히 줄어들었고 알바생의 수도 하나 둘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까지 철이 없어서, 엄마 아빠의 가게가 힘들다는 말만 흘려듣고, 남의 일처럼 반응도 뜨뜻미지근하게 했는데. 얼마 전 처음으로 임대료를 밀렸다는 말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이와 중에 이제까지 사람 좋던 건물주가 갑자기 돌변해서 가게 세를 올리겠다는 내용을 서면으로 통보해왔다는 소식도 들었다. 생활인이 된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 가게가 영원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게 이번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15년이 흘렀지만 '자리를 잡았다'라고 할 만한 자식은 없었다. 맏딸인 나는 거의 최저임금을 받고 있고, 그것도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이 캄캄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말일마다 가계부를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던 엄마 아빠는 그래도 자식 모두 성인이 되고 난 후에 이렇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목소리가 다정해졌다. 그래, 어쩌면 이 가게에서 얻을 만큼 얻었다. 이 험한 세상에서 굶어 죽지 않고 가족 모두가 함께 살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듯이, 우리 가게도 그냥 자신의 운명을 다 해가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그 흥망성쇠가 나에게도 올까. 엄마 아빠 세대가 이제 쓸쓸해져 간다면, 그다음 세대인 우리에게도 '흥'과 '성'이 있을까. 온다면 많이 기다리게 하지 말고 서둘러 왔으면 좋겠다. 내년에 우리 아빠 환갑잔치에 내가 당당히 식비를 계산할 수 있게. 


쓰고 보니까 돈 얘기만 한 것 같아서 씁쓸하지만, 나는 하루하루 세대교체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뭔가가 변화하고 맞물리는 시기인 것 같다. 예전에 망해가는 시장에서 벗어나 재빨리 호프를 선점했던 우리 엄마 아빠처럼, 뭔가가 완전히 달라지기 전에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 하지만 나는 약삭빠른 것도 아니고 운이 좋은 편도 아니라서, 내가 이 변화의 시점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내가 열심히 해서 엄마 아빠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그런 순박한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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