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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Aug 28. 2017

누구 정상인가요




나는 정상일까. 자신 없다. 지금 그런대로 정상이라면 앞으로도 정상일 수 있을까. 자신 없다.

엄마가 예전에 알던 이웃들의 소식을 전해줬다. 내가 엄마처럼 따랐던 아줌마는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 딸 하나를 키우다가 자궁암에 걸렸다. 걷지도 못 하게 된 자기를 챙겨주는 게 고마워서 약간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종교를 믿게 되었지만 정작 아줌마가 죽었을 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치료비로 돈을 다 써버려서 장례식장에 방 하나 빌리지 못해 손님도 받지 못했을뿐더러 수의 할 돈도 없어서 평상복을 입고 입관했다고 한다. 아줌마의 유일한 딸은 예전부터 양쪽 부모를 하나도 닮지 않아서 남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아줌마가 죽고서도 어느 친척도 챙기지 않는 걸 보니 얻어 키운 딸이라는 소문이 유력해 보인다. 내 과학 숙제를 도와주기도 했던 그 언니는 달랑 짐 하나 들고서 신촌으로 집을 얻는다고 떠났다고 한다. 그 아줌마의 품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엄마한테 혼나서 울던 나를 품어주던 풍만하고 부드러운 가슴. 거기서 나던 나물 냄새.


평탄하게 살고 있는 이웃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천진하던 사람들도 무자비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나 보다. 이혼하고, 아프고, 자식이 엇나가고, 집은 작고 더러워지고, 별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비정상'이라는 괴물이 내 귓가에 끈적하고 기분 나쁜 혀를 날름거리는 기분이었다. 잠깐 한눈팔면 그 괴물한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생의 출발점에서 겨우 한 걸음이나 나왔을까. 아니면 두 걸음쯤. 여기서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낳는 순간, 나도 괴물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사방이 천 길 낭떠러지인 외길을 조심조심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런 길을 가겠다고 내 사촌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예식장에 있었다. 나는 낭떠러지에 떨어질 뻔했던 그녀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지 안다. 나도 요새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결혼으로 도망치고 싶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밝고 건전하고 열려있는 세계로. 결혼식은 환상과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내 사촌이 잠깐 부러웠다. 침몰하는 배라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덜 외롭지 않을까 싶어서.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회사에 들어가고 싶고, 검증된 사람과 만나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사람들 모두 비정상에 대한 경계심이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그것에 강한 콤플렉스가 있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어느새 비정상, 비주류, 삼류의 방향으로 틀어져 있는 것이다. 내 안에 그것들로 향하는 나침반이 심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든 적도 많다.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여기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않고 머무르고 싶다는 유치한 생각도 든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한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내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비정상과 맞설 수 있을까.


완전한 정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정상은 재미가 없고 사실 비정상에 조금 끌린다는 것이 나의 문제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자주 정상이고 가끔 비정상이면 비율상 좋을 것 같다. 그것도 유쾌한 비정상으로, 끔찍한 괴물이 위협을 해 올 때 재치 있게 넘길 수 있는 비정상적인 유머감각 같으면 좋을 것 같다.


요새 암울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가, 자꾸 머리가 무겁다. 그래서 기분 전환을 할 겸 <브이아이피>를 보았는데 더 우울해졌다. 이번에는 신중하게 마스다 미리의 <차의 시간>을 주문해서 읽었다. 그리고 이 작가 언니도 가볍지만은 않은 사람이었다는 걸 잊었다는 데서 아차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불안과 불길함은 글로 풀어 고정해 놔야 잊을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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