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사랑해요.
세상을 기술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는 바로 흑백논리라고도 표현되는 '이분법'이 있다. 세상과 사람을 칼로 두부 자르듯이 2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통상적으로 그리고 편의상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특히, 사람을 외향적(Extrovert), 내향적(introvert)이라는 이분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다양한 개성과 가치를 지닌 72억 명의 사람들을 외향적이거나 내향적이라는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분류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두 가지 중 좀 더 가까운 성향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만으로도 자기 탐구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외향과 내향이라는 스펙트럼에서 나의 좌표는 내향 쪽으로 많이 치우쳐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꽤나 확신한다. 평소 마음의 에너지가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하는 순간이 대부분이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선호의 관점에서도 역시 내향적인 성향이 강하다. 사람을 만났을 때의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가 매우 빠르고, 누군가를 만난 후에는 반드시 나만의 동굴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사회관계 이후에 에너지를 얻는 것이 아니라 피로감을 얻는 성향이다. 또, 다수로 구성된 모임보다는 소수로 구성된 모임을 지향한다.
내향인으로서의 약점?
내향인들은 외향인들에 비해 자극에 민감한 편이다. 실제로 심리학자 한스 아이젠크(Hans Jurgen Eysenck)의 실험에 따르면, 레몬즙을 먹었을 때 분비되는 침의 양이 외향적인 사람보다 내향적인 사람이 50% 더 많았다.
내향인으로서 나의 가장 큰 약점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날씨든 외부의 자극에 굉장히 민감하고 영향을 잘 받는 나는 그만큼 상처도 잘 받는 편이었다. 20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타인의 무례한 행동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외부의 자극을 빠르게 포착했고 그로 인해 감정 곡선이 빠르게 요동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부 자극에 대한 내 감정을 즉각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저 끊임없이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고 들어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더라도 생각의 방향을 '나'로 설정하고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었다.
타인의 언행에 즉각적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래서 무례한 처사를 당한 그 순간에는 '내가 뭘 잘못했나?'라며 책임을 스스로에게 전가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한참 동안 사색하고 나서야 나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가 잘못했던 것이고 그저 내게 무례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노한다. 그리고 '나는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까?'라며 우울감에 빠진다.
나에게로 향한다
외부 자극에 민감하면서 그것에 빠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홀로 동굴 속에 들어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깨우치는 것.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둔한 것도 아니다.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착한 것도 아니다. 내향성이란 그냥 그런 것이다. '내향'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향인들의 소프트웨어는 에너지와 생각의 대부분이 '나'를 향해있다. 즉, '나'를 경계로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탐구하기보다는 '나'의 경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기본값인 셈이다.
그래서 외부로 표출하고 내뱉는 것보다 나의 깊은 곳으로 외부의 것을 흡입시키는 것에 익숙하다. 이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유도된다면 깊은 사유가 가능해지고 깊이가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좋지 않은 것들조차도 내 안으로 흡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흔한 경우가 바로 타인의 '말'이다. 나를 향한 타인의 말을 필터링 거치지 않고 내면으로 흡수한다. 그것이 설령 근거가 없는 비난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고민한다. '그의 말처럼 내가 정말 ~인 것일까?'. 그렇게 고뇌하고 좌절하며 결국엔 스스로의 자존감에 직접 생채기를 만들어낸다. 계속해서 누적되는 상처에 자존감은 바닥으로 치닫고 철저하게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나의 가치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타인에게 맡겨버리고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사람은 결코 완벽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임에도 역사적으로 인류는 늘 완전무결을 꿈꾸었다. 이상향을 꿈꾸면서 철인 같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 존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타인도 결국 나처럼 불완전하고 약하고 여린 존재이다. 그러나, 내향성을 지닌 사람들은 그런 불완전한, 결점 투성이인 다른 이의 말을 내부로 흡수하여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기도 한다. 심각한 경우에는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정의한다.
내향인에 대한 오해
그러나, '나'라는 존재를 규정지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그 누구도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그것은 굉장한 오만이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고 앞에 나서지 않는 편이지만 그것이 공포심이나 두려움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냥 그게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이다. 나는 내향적이지만 소심하지 않으며 꿈과 목표를 위해 도전적으로 살아왔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내가 내향인으로서 가진 강점 때문에 가능했다. 끊임없는 사색과 자기 회고, 그리고 글쓰기를 통한 나와의 대화로 뚜렷한 가치관과 신념을 형성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만큼 다양한 색깔을 지닌 생물도 없다. 다양한 가치를 지닌 사람을 단면만 보고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에 담긴 평가라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우리의 본성이자 습성이다. 다만, 타인의 평가가 결코 '절대적이진 않다'라는 것이다. 내향인들은 너무 많은 것을 마음에 담고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를 정의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말에 상처 받지 않아도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들 중 내게 도움되지 않는 것들은 그저 흘러 넘기는 자세다. 그리고 내향적인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상처 받고 움츠러든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날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날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 세상에 조건 없이 날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는 정말 몇 없다. 그 몇 안 되는 극소수의 사람 중 가장 날 사랑해야 할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노력하고 중심이 잡힌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순간 내향성은 더 이상 단점이나 결점이 아닌 장점이 될 수 있다. 내향성은 바꿔야 할 성격이 아니라 내가 강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나의 성격 중 일부이다.
참고로, 내향성도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조나단 칙(Jonathan M.Cheek)에 따르면 내향성 안에서도 사회형 내향성, 사색형 내향성, 불안형 내향성, 제약형 내향성 등 4가지 분류체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나도 내향적인 사람인데 위의 내용들에 공감가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아마도 서로 다른 내향성이기에 나타나는 차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