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 불안이 있으신 것 같네요"

또 하나의 명찰이 드러나는 순간

by 해솔


2020년 초였던 것 같다. 우울증이 있는 것 같아서 동네에 있는 신경정신과에 방문했다. 신경정신과 문을 딱 열고 안에 들어서니 이게 웬걸,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았다.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처음 오셨나요?"라는 명랑한 목소리를 듣고는 내심 안도하며 접수를 했다.


의사 선생님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일반인이 아닌 의료 전문지식을 갖춘 그 앞에서 나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나갔다. 문득 사회학 전공 수업 때 공부했던 의사와 환자 간의 위계관계가 잠깐 뇌리를 스쳤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를 빠르게 훑었다.


만성 불안이 있으신 것 같네요



인자한 표정으로 한동안 이야기를 듣던 그의 첫마디였다. 우울증보다는 만성 불안이 있고 불안의 정도에 따라서 감정 곡선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심하게 요동치는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상담을 하고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병원을 방문한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바빠서, 다른 중요한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약을 먹었지만 역시나 복용 기간이 짧았던 탓일까. 약의 효과는 체감할 수 없었다.


그때 내 마음에 좀 더 관심을 갖고 돌봤다면 지금처럼 불안이 심해지지는 않았을까. 그때보다 요즘 불안이 더 심해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의 나는 전환형 인턴으로 일하고 있고, 당장 한 달 후에 백수가 될지 전환이 될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만성 불안인으로서 내가 갖고 있는 장점이자 단점 중 하나는 어떤 상황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시나리오를 구상해낸다. 잘 됐을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를 고려하고 플랜 B, 플랜 C 등을 계획한다. 이런 성격 탓에 차선의 계획을 구상하려 노력하지만, 사실 취업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계획을 세워도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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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는 만성 불안의 또 다른 흔적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계획을 세우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몇 가지를 더 소개하자면 우선 행복한 상황에서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우울해서 죽을 것 같은 느낌과는 결이 좀 다르다. 하늘이 파랗고 새들이 잔잔하게 지저귀는 날에 기분 좋게 산책을 하다가도 문득 가슴 한 모퉁이가 천천히 젖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스포이드에 물을 담은 다음 친구들에게 뿌리며 장난치다가 교과서 모서리가 젖어서 눅눅해진 것처럼 하루에도 몇 차례나 그런 느낌에 젖어든다.


하나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도 만성 불안의 흔적 중 하나인 것 같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20대 청년의 사명과도 같다. 즉,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20대 청년이라면 누구나 짊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불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겪는 그 불안의 정도가 크다. 그리고 빈번하다. 그것이 어떤 하나에 몰입하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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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먹먹함을 자아내는 수많은 생각들에 괴롭힘 당하고 그것을 방어하느라 정신이 없다. 만성 불안을 겪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불안의 정도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크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불현듯 방문하는 이 불청객을 어떤 방식으로든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하루가 전쟁 같이 치열하다. 불안과 초조를 만들어내는 불청객과 그걸 어떻게든 막아내려는 목소리가 수시로 싸움을 벌인다. 그래서 정신이 없고 어딘가 항상 불안해 보인다.


애석하게도 나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만성 불안증에 대한 해결책을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그저 '만성불안인'이라는 명찰을 오랫동안 가슴에 달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리고 나의 자아와 내면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들여다본 사람으로서 시도하고 있는 여러 방법들을 조심스럽게 얘기해볼 뿐이다(뒤에 이어질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길' 글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오랜 시간 동안 불안 속에서 살아온 내가 내린 결론은 만성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치기란 불가능하다, 대신 그것의 짙은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희석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어떤 상황이나 현실을 개인의 힘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더라도 그것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내 만성 불안을 흐릿하게 만들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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