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 곁에 남기
누구나 '나'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다. 그것은 선천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회라는 구조체안에서 생존을 위해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억누르고 유연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 속의 나'로 둔갑한다. 그것은 위장에 가깝다. 수많은 포식자들과 늘 도사리는 비가시적인 위협들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보호책에 가깝다. 이 역시 본능적이다.
다만, 본능적이라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존재 위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덧칠하는 작업은 굉장한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자아는 점점 벌어지는 간극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느끼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나로서 오롯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내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몸이 알아챈다. 피로감과 우울감이 그것이다.
내향적이고 혼자 있는 걸 좋아했던 나는 사람과 부대끼고 오면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 소모를 느끼곤 했다. 체력적인 소모가 아니라 정신적인 에너지 고갈이었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봤고, 타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사회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온 정신을 그곳에 집중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나 어느정도 자신을 숨기겠지만, 내 경우엔 정도가 심했던 것 같다. 당시엔 거절을 해선 안된다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피로감이 더 심했었다.
어느새 나는 스스로를 내가 인정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타인이 바라고 인정하는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타인이 바라는 '나'가 나라고 착각했고 타인으로부터 투영된 그 이미지를 끊임없이 내 자아 위에 덧씌우고 있었다. 그런 행위는 필연적으로 에너지 방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만나도 즐겁지 않고 관계는 서서히 악화된다.
내가 정말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선 먼저, 내게 투영된 이미지를 걷어내야 했다. 모든 걸 정말 내 마음대로, 안하무인격으로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버텨낼 수 있는 정도까지만 남겨두고 그 외의 것들은 털어내야 했다. 가장 먼저 외향적인 이미지를 벗어버렸다. 내향의 끝판왕인 내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난 활발한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관념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기학대를 행하고 있었다. 그 명제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내향적이고 활발하지 않아도 곁에 남을 사람은 남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이미지를 털어냄으로써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생각처럼 사람들이 떠나가지도 않았다.
신기하게도,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알아보고 좋아해줄 사람은 반드시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꾸며낸 모습 이면의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그 깊은 이면 그 자체를 아껴줄 사람은 반드시 있더라. 내가 나로서 존재할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짜 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하고 어느 순간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