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12월부터 금요일 오후면 배낭을 싸서 나갔고 일요일 밤 11시나 되어야 들어왔다. 나는 남편이, 친구들 만나서 뭔가 속 얘기를 하면서 풀고, 그냥 3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업계에서 슈퍼루키로 떠오를 만큼 직업적으로 성공하게 되니 앞으로 삶의 목적을 어떻게 세워야 하나. 그게 힘들어 방황하는 줄 알았다. 늘 혼자 술을 마시다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폭언하다 결국 욕으로 마무리 짓고, 그러다 침대에 갈 힘도 없어 앉아서 잠을 자는 추한 모습을 8년 동안 봐오던 나는, 주말에 남편이 없으면 나에게 언제 욕을 또 퍼부을지 몰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편하기도 했다.
주변 지인들이 말했다. 그런데 혜송, 남편이 돈을 주지 않는다는 거는 되게 이상한 거야. 음? 그렇긴 한데.. 우리 남편은 원래 짠돌이니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좀 이상하게 집요한 부분이 있으니 그 부분만큼은 포기를 못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10명 중의 8명이 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고 나한테 은연중에 에둘러 표시를 해줬는데 나만 멍청하게 모르고 남편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우리 남편, 그럴 사람 아니에요. 에이, 무슨 소리야~ 바람은 아닌데? 친구 만난다잖아. 친구 만났겠지. 해외여행? 혼자 다녀온다잖아. 혼자 다녀왔겠지. 근데, 친구들이 12월부터 얘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네? 어?
내가 남편에게 얼굴을 처 맞은 후, 대학시절 굉장히 아꼈던 후배의 남편이 변호사라 통화할 기회가 생겼다, 남편이 12월부터 집을 나간다고 한마디 하니 그분은.. "XX" 바로 단어를 뱉으셨다. 스읍. 좀 이상한데? 이분은 변호사가 직업이다. 어마어마한 케이스를 접한 사람이고 시간이 돈이며 분석력이 높은 사람이다. 근데, 내가 아주 일부분만 말을 했는데 왜 바로 저 단어가 나오는 거지. 하 참 희한하네. 우리 남편은 바람을 피울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다. 그냥 우리 남편은 방황하는 중인데. 8년 동안 책 읽는 꼴을 못 봤는데 요즘 두툼한 책도 한 권을 벌써 절반 이상이나 읽었고, 집안일도 안 하던 사람인데 막 8년 만에 애들 밥도 하고.. 물론 내 빨래는 던져버리고 치사하게 지 빨래랑 애들 빨래만 개 놓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 달 하고 때려치우고, 또 안 하기 시작했고. 평일은 물론 주말에, 한 달에 한 한 번도 애 기저귀를 갈지 않지만. 일단 가장 큰 변화는 내 앞에서 술 안 마시잖아. 아니, 계속 술 먹고 폭언하고 욕하던 사람이 술을 안 마신다니까?
저 인간이 술 안 마시는 거는 진짜 지구가 뒤흔들릴 만큼의 큰 변화인데. 나 너무 편해. 언제 돌변해서 욕 할지 모르니까 24시간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내면소통>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책도 보잖아. 사람이 진짜 이번 기회에 바뀌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 와중에 힘들어하는 거야. 내가 잘 기다리면서 지켜봐 줘야지. 근데 나는 몰랐네. 그게. 하 참, 상간녀가 읽던 책인 줄. 술보다불륜이라는 더 큰 자극과 중독에 취해 나를 속이며 연기하고 있었다는 걸.
네이버를 켜고, 외도전문상담소를 검색해 제일 신뢰가 가 보이는 곳에 전화를 했다. 답변. "100% 여자 있다" 아 변호사고 뭐고, 다들 나한테 왜 이래 진짜. 우리 남편 바람 난 거 아니라니까? 근데 이 사람들 전문가들인데 왜 이러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유튜브에 < 이런 모습 보이면 100% 남편 바람 > 에 왜 그가 다 해당하는 걸까? 아, 이상하네. 이상해. 그냥 다 혼란스럽네. 뒤돌아 생각해보면 몰랐던 내가 너무 빼박 등신이었다.
물론 해외 연수 갔을 때 약속한 거, 돌아오면 애들 크리스마스 트리 만들어주기로 했던 거. 당연히 안 하고 크리스마스/이브 때 잠수 타서 나 혼자 연휴, 아니 뭐 6개월 내내 주말 포함 독박육아 했지. 해외 간 2달은 어땠냐고? 애들 안부 묻기는 커녕 내가 거는 영상통화 한 번 제대로 한 적 있나, 인터넷이 안 터진다 하더라고. 난 또 믿었지. 귀국하면 둘째랑 매일 키즈카페 가기로 했었는데 아내인 난 그가 한국에 언제 입국한지도 몰라, 잠적했거든. 그러다 자기 엄마 뒷구녕에 쫄쫄 붙어 찌질하게 집에 들어왔지.
왜 저러나 했다. 남편은 한국에 온 후 원래도 개복치인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렸을 거다. 아뿔싸, 돌아오고 나니 수습 안 될 사고를 너무 많이 쳤음을 직면했기에. 그냥 잘못했다고 빌지, 그 때 잘못 인정하고 정리했으면 이렇게까지 안 됐잖아. . 심지어 둘째 첫 생일. 그 날, "첫 돌"이니까 케이크 하나 사다 달라 했는데 그것도 안 사와서, 어.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비가 억수 같이 퍼붓는 날 우산도 없이 비 다 맞으면서 뛰어가 핑크색 케이크 사와서, 그 새끼 앞에서 젖은 생쥐 꼴로, 보란듯이 초 꽂고 애들이랑 같이 생일 축하 노래 부르긴 했지.
근데 바람 핀 건 아닌데.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다 집에 없었긴 했지만 원래 태생이 쪼잔한 새끼라 나랑 지금 대화 거부 중이잖아. 아, 물론 한 달 거의 4주 없었긴 했어. 요즘 향수도 사고 외모에 관심이 늘고, 심지어 자기 물건도 원장실에 옮겨두고 택배도 학원으로 시키긴 했..? 아, 씨이이이발. 럽스타그램. 이게 있네. 남편의 비공개 계정에 올라온 럽스타를 봤다. 나는 약 10년 동안 남편의 사진 찍는 앵글을 아는 사람이고, 남편이 찍은 사진이 아닌 게 있다. 나는 안다.
이 피드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뭐지?"
넘기면서 생각했다. "뭐지?"
초 하나가 켜진 딸기 생크림 케이크. "이상하다" 생각했다. 왜냐면 내 전남편이 될 사람은 약 10년 동안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자기가 골라서 사먹어 본 적이 없으니까. 왜냐면, 생크림 케이크 안 좋아한대. 늘 투썸플레이스에서 딸기가 올려진 초코 케이크를 먹지.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홀 케이크를, 남자 혼자 사서 초 꽂고 먹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사진 구글링 해보니 국립중앙도서관? 엥? 뭐야. 8년 동안 책 읽은 적 없는 인간이 대체 여길 왜 가. 도서관은 늘 나 혼자 다녀왔고. 얜 도서관에 갈 이유가 없는데?
케이크를 확대해보니 상표가 나왔고, 검색해보고 지도에 표시를 했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도 지도에 표시했다. 도보 15분 거리에 남편 동종 업계 학원 딱 하나 나오네. 응, 이번에 전남편 될 새끼랑 같은 기간에 해외 연수 갔다 온 년. 이 년 학원 옷걸이가 우리 학원 탈의실에 갑자기 생겼고, 얘 수건이 학원 원장실에 숨겨져 있었지. 내가 그걸 본 다음 그 새끼가 원장실 문을 잠그기 시작했어. 근데 얜, 저기, 어. 우리 애들을 직접 안아 준 적도 있고, 심지어 해외에서 다 같이 잠깐 영상통화 한 적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