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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Dec 06. 2021

화가 날 땐 일단 뛰기 시작한다.

난 뛴다. 화가 날 때 뛴다. 마음속에 출렁이는 불편한 감정들이 쌓인다 싶으면 바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나가서 뛰기 시작한다. 


사실 화가 나면 그 대상에 대고 오목조목 따져보거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할 수도 있지만, 종종 '쉽게 꺼내지 못하는 분노'를 맞닥뜨리기도 한다. 이 꺼내기 불편한 마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기엔 아직 나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마음이지만, 분명 표출한다 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무력함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왜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 게 전 사람을 잊지 못하는 거라 생각해?" 라던지 "왜 여전히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게 미덕이라는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 거야? 말만 다들 바뀌었다 하지. 정작 대부분은 여전히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며 넘기지 않아?"와 같은 데서 오는 분노가 있다. 이런 종류의 문제들은 자칫 잘못 꺼내면 극단적이거나 급진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두려움에 잘 언급하지 않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더 정확히는 아주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 문제들과 부딪힐 때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화를 마주하곤 한다. 그 사람은 친구이기도, 아빠이기도, 할머니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마찰은 잦아지기 쉽다. 그리고 그래서 순간적인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출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는 걸 배웠다.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달리기였다. 


달리기라는 말보다 뛴다는 말이 더 와닿는데, 같은 맥락으로 내게 달리기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승화'에 더 가깝다. 뛰는 거도 어떤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무작정 뛴다'. 어느 정도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최대한 양쪽 발에 같은 무게를 실어 부담이 가지 않도록 만든다. 그렇게 소위 미친 듯이 뛰다 보면 금방 한계에 다다르곤 한다. 이 부분에서 살짝 피식할 수도 있긴 한데, 그런 한계가 오면 남아있는 화를 다시 끄집어내 본다. 놀랍게도 그러는 순간 누워있던 선수가 다시 일어나 회심의 일격을 가하듯 이 악물고 다시 뛰게 된다. 그렇게 내내 달리다 보면 조금씩 생각이 차분해지기 시작한다. 주변이 조용해지다 조금씩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팔 길이 정도 떨어져 걷는 노부부, 조용히 무단 횡단하는 고등학생, 부스 안에서 졸고 계신 수위 아저씨, 별보다 더 밝은 아파트 조명등. 


달리기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종종 뛸 때마다 생각나는 에피소드를 하나 덧붙이려 한다. 예전에 친해지지 얼마 안 된 한 지인과 만나 달리기를 하는데 몇 킬로쯤 뛰었을까 내게 대뜸 달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고 했다. 그는 "달리기 할 땐 어지러울 수 있으니 절대 바닥을 보면 안 돼. 절대. 항상 앞을 멀리멀리 보며 뛰어."라고 조언했었다. 음... 난 그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달리는 건 저마다의 방식이 있고, 난 달리는 동안에는 어디를 보던 별로 어지러워하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저 멀리 어딘가에 집중하며 뛰었다가는 내 성격에 넘어지기 십상일 것이다. 


난 뛸 때 항상 내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서 있는지 확인한다. 내가 딛고 있는 지면이 평평한지 딱딱한지 볼 수 있어야 안심한다. 어쩌면 내가 하루하루를 보내는 방식도 이와 비슷한 거 같다. 먼 미래까지 계획해야 현실에 덜 멀미가 난다는 사람이 있고, 현재 내가 하는 선택과 내 상태를 인지하는 게 우선인 사람이 있다. 어떤 방법을 택하던, 바닥을 보고 뛰던 먼 지표를 보고 뛰던, 중요한 건 달리고 싶은 만큼 달려야 한다는 것 아닐까. 난 아마 앞으로도 화가 나면 종종 뛸 것이다. 그런 달리기의 이유를 굳이 스스로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언제든 뛰기 시작하면 돌아오는 길까지 내내 힘이 남아있길 바라고, 또 그래서 언제든 뛰러 나갈 용기가 내내 함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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