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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박 돌봄' 대신 '서로 돌봄'


1. 누가 나를 돌볼 것인가,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     


 ‘사회적 돌봄’의 문제는 코로나 19 사태 이후 그 중요성이 재환기됨으로써 정부와 사회의 중요 어젠다 중 하나가 되었다. 점점 개인화되어가는 사회적 분위기와 더불어 불과 십몇 년 사이에 독립 가구 수가 급격하게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돌봄 문제는 개인의 처지와 능력에 의지한 채 해결되길 바라는 이른바 ‘각자도생’의 범주를 넘어선 지 오래다. 게다가 최소한의 각자도생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회적 취약 계층의 경우 무력감과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돌봄의 문제는 사회의 안전망과 직결되는 공공의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부합하여 지역 사회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시민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관련 요구 사항들은 보다 구체성을 갖추며 현실화되었다. 지역 사회와 정부 또한 ‘복지 실현’을 우선적 목표로 하고 돌봄 문제를 국가적 사업으로 전환하는 등 제도 정착과 서비스 제공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양과 질에 있어서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의료•요양 분야의 공공복지 시설은 많이 확충되었고, 아동과 노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돌봄 서비스들을 도입•확대하는 등 복지 시스템이 점점 진보해나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올초 ‘코로나 19’ 팬데믹의 장기화로 인해 돌봄 문제 해결의 주체는 개인이나 가족에게로 회귀되는 현상을 보이면서 각자도생 했던 과거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동안 돌봄을 담당했던 공공 기관이나 시설이 폐쇄되고 돌봄 서비스와 시스템이 일제히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에 이르게 되자 사회적 취약 계층은 물론 다수의 개인 역시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이용했던 돌봄 서비스를 받지 못하거나 심할 경우 아예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점 등이 이러한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아이들의 경우 돌봐줄 ‘가족’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가족’ 또는 ‘가족같이’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이 홀로 집에서 ‘강금’되었고, 건강이나 장애를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국가에 떠맡겨진 취약 계층은 전염을 문제로 ‘강금’조차 포기 당해 삶을 위협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돌봄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폭탄 돌리기 게임을 연상시킨다. 물론 제일 먼저 느끼는 건 언제 폭탄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일 테고 그다음은 폭탄이 터짐으로 하여 내가 받는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이것만큼이나 끔찍한 건 바로 내가 그 폭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만 폭탄을 던져준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딜레마가 빠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존과 공멸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결국 돌봄이라는 화두에는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를 돌볼(수 있)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질문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찾았을 때 비로소 돌봄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완전하게 해결될 것이다. 무엇보다 돌봄이라는 화두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 주체와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누구든 그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독박으로 해결되는 건 없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이란 명칭이 보편화되기 전까지는 보호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했다.(물론 지금도 법적,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업무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보호자라는 호칭이 훨씬 많이 쓰이고 있다)주로 경제적•법적 능력을 갖춘 사람을 보호자로, 반대로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보호를 받는 대상을 피보호자로 호명한다. 또한 보호자는 법을 근거로 피보호자의 권한을 일체 위임받는 것은 물론 피보호자의 ‘미성숙함’을 근거로 하여 보호자의 결정은 피보호자의 의사보다 늘 우선시된다. 그렇기에 보호자와 피보호자와의 관계는 수직관계이자 일방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보호자 자격을 가졌다고 해서 권한만 있는 ‘갑’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보호자는 피보호자에 대한 법적•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호할 능력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보호자로 위치 지워진 이상 피보호자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우리 사회는 ‘부모의 도리’ 또는 ‘자식의 효’라고 불렀고, 그 행위는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그 결과로 얻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나 ‘병원비로 가산을 탕진했다’는 건너 건너의 말들은 그럴듯한 소설보다 잔인한 현실에 가까웠다. 오직 보호자에게 모든 것을 책임 지운 탓에 극한의 경우 생업조차 포기하면서까지 보호를 유지해야 하는 형태는 결국 보호자에게 물리적/심리적 파산만 남기고 마는 것이다. 보호자에게는 원망과 빚을, 피보호자에게는 죄책감과 자괴감만을 남기는 방식의 보호는 가혹하단 말 말고는 적절한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극단적 상황은 사회적 소외계층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게 마련인데 자기 한 몸도 책임지기 버거운 현실에서 피보호자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물적•심적인 무게감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저 은유로만 상상할 뿐이다. 잘은 모르지만 가난이나 질병과 같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 절망에 놓였을 때 보호자가 느끼는 좌절과 자괴감은 정제된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날 것 그 자체일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절망이 비단 보호자 당사자만의 비극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책임 대상까지 모두 비극으로 내몰았다는 뉴스 기사를 보게 되면 우리 사회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단호하게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모든 책임과 의무를 독박 쓰는 ‘독박 보호’는 절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실 ‘무한책임’만큼 무섭고도 잔인한 말은 없다. 그리고 이 언어가 내재하고 있는 반인간성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돌봄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막상 여기에 투입되는 돈과 인력, 법 제정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드러낸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시설을 폐쇄하고, 값싼 노동력에 의지해 돌봄 시스템을 유지하며,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돌봄을 자처하는 생활 동반자를 보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에서 돌봄 문제는 여전히 개인의 독박에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

파편화된 개인이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에 ‘나’가 온전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나는 언제든지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나 역시 누군가의 도움과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라는 개인 이 사회에서 진짜로 필요한 건 책임을 독박 쓸 가족 같은 수직적 개념의 보호자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의지할 수 있는 수평적인 돌봄 시스템이다. 질병과 노년, 세대, 그리고 돌봄에 대해 통찰을 담고 있는 책 �새벽 3시의 몸들에게�의 저자 전희경은 이러한 돌봄의 형태를 가리켜 ‘시민적 돌봄’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모든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돌보는 실력과 돌봄 받는 실력을 둘 다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시민적 돌봄’은 이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와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동하도록 만드는데 독박의 돌봄은 결코 남의 일만으로 치부할 수 없으며 나는 언제든지 이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도,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혼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인간은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짐이고, 또한 힘’[1]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데 있어 혼자서만 ‘잘’ 살아가는 것을 오롯한 목표로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잘 사는 건 고독한 삶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혼자 살수록 타인의 도움은 오히려 더 많이 필요하다. 돌봄이란 말이 지금의 개인주의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화두가 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될수록 타인의 도움에 의지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돌봄의 영역은 특수한 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아/아동/노인, 장애/환자, 가사/요양 등 돌봄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영역은 없을 만큼 우리 일상과 밀접한 행위가 바로 돌봄인 것이다.       


3. ‘서로 돌봄’의 사회


집단 면역의 효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 �면역에 관하여�에서 작가 율라 비스는 집단 면역의 원리를 예금에 비유한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고 집단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충분하지 않은 백신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접종하게 되면 바이러스 전파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백신을 맞은 사람은 물론 맞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 백신 미접종자는 접종자 덕분에 질병으로부터 보호받고, 접종자는 백신 효과로 면역력을 얻을 수 원리가 바로 집단 면역의 원리[2]인 것이다.

‘서로 돌봄’의 기능과 그 효과는 율라 비스가 설명하고 있는 집단면역을 위한 예방접종에도 적절하게 비유될 수 있다. 예방접종의 1차적 목적은 (효과 여부나 정도는 차치하고 어쨌든) 개인의 건강과 안녕에 있다. 그러나 이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따라서 예방 주사를 맞든, 혹은 맞지 않든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기에 타인에게 예방접종을 권유할 수 있어도 강요할 수는 없다. 타인의 신체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방접종의 행위가 비단 개인의 보건 효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면역과 건강까지 보장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면 예방접종은 단지 개인의 선택이 아닌 공중 보건과 안전을 위한 배려이자 필수로 그 이해의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돌봄의 문제 해결 역시 집단 면역이 만들어지는 원리처럼 돌봄을 개인의 능력이나 의지에만 기대하거나 미룰 것이 아니라 사회의 안전망을 지키기 위한 필수 행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돌봄의 문제는 특정 계층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철저히 예방 접종을 하는 것만으로는 집단 면역을 얻을 수 없듯이 돌봄의 문제는 개인의 의지에 기대거나 혼자서만 ‘독박’ 책임을 지는 형태를 띠어서는 곤란하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돌봄의 관계는 일방적이지도, 수직적이지도 않다. 언제든지 나는 돌봄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돌봄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 돌봄의 관계를 수직관계가 아닌 순환 관계로 이해하게 되면. 그리고 돌봄의 부담을 개인이 아닌 이웃이, 공동체가, 사회가 조금씩 나누어 갖는다면 적어도 독박 돌봄으로 인한 절망감, 죄책감, 우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은 얼마라도 줄어들 것이다.

갓난쟁이로 태어나 성인이 되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고, 다시 노인이 되는 과정에서 어디 하나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과정은 없다. 우리는 부족해서 도와주고 부족하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고 도와주는 이 삶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자본화, 개인화, 파편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계는 독립적으로 자립해서 처절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정글의 세계가 아니라 가족이 없어도, 부모가 없어도 서로를 기꺼이 돌볼 수 있는, 혼자 짊어지어야 하는 독박 책임을 이유로 정작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자기의 생명에 끈을 놓지 않아도 되는 ‘서로 돌봄’의 세계다.     

*참고문헌*

[1]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책, 2020년

[2]율라비스, <면역에 관하여>, 열린책들, 김명남 옮김, 2016년.



*이 글으 <르몽드 문화 톡톡>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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