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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살 곳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장애인=‘일할 수 없는 몸’이라는 인식     

17세기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설립된 구빈원은 잘 알려져 있듯이 대표적 공공 격리 시설이다. 당시 지배층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 군주 통치를 유지하는 데 있어 ‘쓸모 있는 사람’에 대립되는 ‘쓸모없는 사람’을 골라내고 이들을 통치 질서에 방해가 되는 비이성적 존재로 규정하여 구빈원에 강제 수용했다. 구빈원이라는 이름처럼 근면과 노동 윤리에 반하는 가난한 사람이 주요 격리 대상이었지만 장애인, 정신병자, 범죄자 등도 강제수용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구빈원에 격리되는 동안 처벌의 대가로 노동을 해야 했는데 당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막 도입된 시기였고, 자본 축적을 위한 핵심 수단이 바로 노동이었던 만큼 구빈원은 ‘비정상인들’로부터 노동을 창출하고 관리하는 공식 기관으로 기능했다. 그러다가 보다 높은 생산성과 효율의 노동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쓸모없는 사람들’에 대한 재분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이에 따라 ‘쓸모없는 사람들’은 다시 ‘일할 수 있는 몸(the able-bodied)’과 ‘일할 수 없는 몸(the disable- bodied)’으로 구분되었고 후자에 분류된 대상은 별도의 ‘시설’로 보내졌다. [1] 거듭된 격리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일할 수 없는 몸’으로 배제된 대상과 그들을 위한 별도의 시설이 바로 지금의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 보호 시설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 별도의 시설로 보내지는 장애인’의 개념은 유감스럽지만 이백 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무의식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강제적’이나 ‘일방적’과 같은 수식어는 많이 줄었지만 일반 학교 대신 특수학교에 다니며 장애인 맞춤 교육을 받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 불편한 몸으로 외롭고 가난하게 사느니 보호 시설에 소속되어 보호받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이런 무의식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무의식화된 중심적 사고가 장애인으로 하여금 시설이나 기관을 선택할 수 권리 또는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데 있다.

장애인 시설의 공적인 명분은 장애 분류에 따른 보호와 교육이다. 그러나 그것이 장애인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공간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맞바꾸어도 될 만큼 등가적인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체가 결핍되었다는 이유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수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공간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 것인가.  

    


탈시설은 반항인가, 저항인가     

보호 시설에 편입되면서 장애인은 자율적 개인이 아닌 보호받아야 할 피보호자로 위치 지어진다. 보호자에 의해 선택되고 관리되는 존재로 그 신분이 이동되는 것이다. 그리고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결핍/부재의 상태로 규정하고 ‘좋은’ 선택을 (이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피보호자로부터 선택과 책임의 권한을 부여받는다. 보호자의 말은 피보호자에게 새로운 공간에서 지내기 위해 지켜야 할 질서가 된다. 이 질서에 대해 거부하거나 반항할 경우 보호 공간을 사용할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는 빌미로 작용되기도 하고, 극단의 경우 보호자가 피보호자를 퇴출해도 된다는 주장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 피보호자인 장애인은 보호자와 공간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설로부터 이탈하는 행위를 두고 퇴출과 자립을 구분하는 기준을 주체의 자율성에 둔다면 유감스럽지만 피보호자라는 신분 상태에서는 ‘퇴출’이란 용어는 성립될지 몰라도 ‘자립’은 성립되기 어려운 용어다. 만약 보호 시설의 궁극적 목적이 장애인들의 자립과 지역 사회로의 복귀에 있다면, 그리고 시설로부터의 이탈을 보호자를 향한 반항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저항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탈시설화와 지역사회로의 복귀 활동은 지금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분리당하고 격리당하는 삶에 대해 그 누구도 자신이 선택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전제를 따르자면 보호시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보호와 감시가 아닌 탈시설로 삼아야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을 보는 시선에서 불편함을 제거하지 못한 까닭에 탈시설은 생각보다 하는 사람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쉽지 않은 결정인 것만 같다.

<어쩌면 이상한 몸>(장애여성공감 엮음, 오월의봄, 2018)은 장애를 가진 여성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글로 엮은 책이다. 장애인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지만 비장애인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친구들과 유흥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또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애가 심각하지 않아서, 부모를 잘 두어서, 하다못해 운이 좋아서도 아니다. 다만 모두 탈시설에 성공하여 지역 사회 안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시설에 있으면 의식주도 해결되고,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도 받을 수 있는데 왜 굳이 탈시설을 욕망하는가?’라고. 물론 장애인이 탈시설을 하게 되는 순간부터 맞닥뜨리는 문제들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특히 성인이 되어서까지 오랫동안 시설에서 생활했을 경우, 자립과 관련된 교육을 받지 않았을 경우 탈시설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당장 월세와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몸이 불편할 경우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난관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보조자 없이는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처지라면 탈시설은 영원한 로망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들이 탈시설을 원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인간은 보호받고 싶은 본능만큼이나 자유를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탈시설에 성공한다는 것이 대단히 특별하거나 거창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내 공간에서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보고 싶은 티브이 프로그램을 마음대로 선택하고, 잠이 안 올 땐 밤을 새기도 하고,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노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다. 이것이 특별한 소원이라면 이것을 일상처럼 누리는 비장애인이야말로 ‘특수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영화감독이자 국회 의원인 장혜영은 <어른이 되면>(장혜영, 우드스톡, 2018)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와 책을 제작하여 탈시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을 다시 한번 재조명한다. 18년 동안 시설 생활을 했던 동생을 탈시설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잇따랐다. 그는 아무리 친동생이라고 해도 성인이 될 때까지 함께 살지 않았던 장애인 동생과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려움은 장애의 여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타인과 함께 산다는 것 그 자체로 어렵고 힘든 일이지 나와 다른 몸을 가져서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김새와 조건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보편성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세상이라고 구분 짓고, 격리된 세계와 존재를 각각 비정상과 열등으로 치환해버리면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은 배제와 혐오 말고는 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장혜영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를 시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해 지적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출발선에서 시작한다면 이것은 시혜가 될 수 있지만 사회는 동일한 조건과 환경을 가진 사람들로 형성된 집단이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더 힘든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류 집단은 이런 상대적 조건을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고 여기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을 ‘사회적 약자’로 통칭하며 이들을 위한 제도나 혜택을 특별히 주어지는 것, 시혜 혹은 호의로 격상시켜버린다. 그러면서 주류가 베푼 호의에 대해 ‘사회적 약자’에게 보답이라도 하라는 듯이 장애를 뛰어넘는 능력이나 실력을 찾아내어 죽을 만큼 노력해 초인간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을 기대하거나, 성숙한 성인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만은 아이 못지않은 순수함을 간직하여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웃음과 감동을 준다는 식의 스토리텔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기도 한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장애 혹은 장애인을 다루는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가난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보호자에 대한 보답(은혜)으로 장애를 극복하는 ‘성숙한 장애인’을 그린 영화,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성인이지만 지적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순수한 아이로 다루며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담당•제공하는 이른바 ‘철없는 장애인’을 그린 영화들이 그렇다.     


특수함 말고 평범함      

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변호사 김원영은 <희망 대신 욕망>(푸른숲, 2019)에서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담담히 그려낸다. 본인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재활원이라는 특수 교육기관에 입학했을 당시 그동안 한 번도 봐오지 못했던 다양한 ‘장애인’들의 모습은 장애인 본인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재활원이란 시설이 ‘정상’ 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준비 단계이자 완충 역할을 해주었다는 측면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필요한 기관임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비슷한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특수한 세계’ 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일반의 세계’였기에 탈시설을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이 세상은 타고난 배경이나 조건을 이유로 구분되고 분리되어 움직이지 않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에게 탈시설은 자유를 위한 도망이나 도피와 같은 로망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간다는 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가 그만큼 확장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보편적 개인’이 인간의 본래적 욕망이라면 그 어떤 이유로도 타인으로부터 선택의 권리를 제한받거나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장애인 역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선택의 기준을 오로지 자신의 특수함에만 두게 되면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세상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늘 일반적이고 정상인의 신체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변화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순응적, 체념적 태도로 일관하며 자신의 특수함에 부합되는 것만을 선택하게 되면 결코 존재는 더 큰 세계로 확장해나갈 수 없다. 김원영의 말처럼 어디에도 ‘특수학교, 특수 회사, 특수 국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의 장애인들을 향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만큼이나 필요한 건 장애인 당사자들에 의한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권리 표현일 것이다.

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장애인의 날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초중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애인을 주제로 하는 글짓기 행사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었다. 그 내용들은 대개 비슷했는데 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 중에 하나는 “빨리 나아서 나랑 같이 놀자”였다. 이 문구를 볼 때면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동시에 장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여전히 요원하다는 생각에 탄식이 나온 적이 많았다. 어쩌면 아이들의 순수한 바람과 달리 빨리 나아서 놀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빨리 낫는 그날까지 그 친구는 과연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병원, 기관, 시설, 특수학교로 가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날이 오지 않으면 영원히 거기서 나오지 못한 채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일까? ‘빨리 나아서’라는 조건은 지워져야 한다. 내가 사는 세계는 조건에 구분되는 우리/그들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이글을 <르몽드드플로마티크>7월호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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