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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지막 숨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모든 생물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죽음이다. 죽음은 두려워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다. 죽음은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고귀한 사건이다.”[1]     


죽음이 두려운 이유      

사람들은 죽는 게 두렵다고들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건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게 만드는 것, 이를 테면 늙는 것 또는 병드는 것 일지도 모른다. 노화로 인해 또는 질병으로 인해 수십 년 동안 내 의지대로 통제하고 움직였던 신체를 더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실존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만들어내기 충분하다. 이 불쾌함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즉 내 몸을 원래의 상태로 돌릴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려는 인간 욕망의 기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문명과 그 결을 함께 하며 오랫동안 존재했음은 수많은 역사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는 바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을 피하고 싶은 욕망은 절대 이룰 수 없기에 더 간절한 욕망이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일이지만 비약적으로 발달한 의료 기술과 의학 덕분에 지금 우리는 건강한 몸은 보장할 수 없더라도, 생명은 과거보다 훨씬 길게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공중위생 개념이 보편화되면서, 예방의학이 발전하면서, 그리고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개념이 개입되고 자본의 척도가 생명 연장의 욕망을 이루는 데 결정적 수단이 되면서 죽음은 능력과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지연’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전환의 흐름이 점점 고착화되면서 생명은 깨끗함/선함/아름다움/부로, 죽음은 더러움/악함/추함/가난으로 이분화되면서 인간의 한살이 과정에서 죽음은 점점 그 영역을 축소당하거나 아예 배제되고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질병이나 노화를 부르는 명칭이나 그것을 서술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적/방어’, ‘전쟁/극복’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등 피하거나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것들로 은유하여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일상은 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약 20여 년 전부터 임종의 장소로 자택이 아닌 병원이나 요양(병)원과 같은 의료 기관을 선택하는 현상이 확대되면서 이제는 집에서 임종을 맞는 것보다 의료 기관에서 임종을 맞는 것에 훨씬 익숙해졌는데 이러한 상황은 우리 삶에서 죽음을 한층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이 인생에서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님에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죽음을 삶으로부터 분리, 배제시키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나 절차에 대해서는 이른바 ‘의료 전문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맡겨버림으로써 죽음을 앞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죽음과 동반되는 부담과 의무로부터 가벼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됨으로써 죽음에 대해서는 그만큼 무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문제는 이 죽음에 대한 무지가 죽음을 공포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공포란 죽음 그 자체가 주는 절대적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겠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실체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낯선 두려움이기도 하다. 

어째 되었든 ‘의료 전문가’와 그들로 구성되어 운영되는 의료 기관은 ‘질병 치료와 회복’이라는 본래적 기능 외에 ‘생명 연장의 가능성’의 구현 기능이 추가되고 이것에 실패할 경우 죽음을 담당하게 되는 공공의 공간으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죽음은 자연스러운 생의 마지막 과정이 아닌 ‘의료 처지 중단으로 인한 기술적 현상’[2]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환자의 몸은 물론 죽음의 과정에까지 의료 시스템이 깊숙이 개입함에 따라 환자의 삶과 죽음은 당사자에게 달려 있지 않은 대신 의료 기계, 의료진(을 포함하는 기관), 그리고 보호자 혹은 가족의 선택에 달려 있게 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세 사람을 모두 만족하는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 데서 딜레마가 생긴다. 가장 먼저 죽음을 앞둔 당사자는 ‘죽기 전’까지는 절대 병원을 떠날 수 없는 처지가 되면서 충분히 그리고 ‘마음껏’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환자를 보호하고 책임질 가족 역시 치료를 포기하는 것은 그를 포기하는 것과 동급으로 생각하고 치료를 선택하지 않을 경우 차후에 생길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쉽게 치료를 포기하지 못한다. 의료진 역시 생사를 결정하는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료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저버릴 수 없기에 때로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지속하거나 반대로 의료 시스템을 직접 개입한 당사자란 이유로 죽음을 선고해야 하는 고통을 마주하기도 한다.


 누구의 죽음인가     


공중위생의 발전,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개입하게 되면서 생명 연장의 욕망은 자본만 충족할 수 있다면 아주 불가능하기만 한 꿈이 아니라는 걸 경험하게 되는 실례가 늘자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자연의 섭리로 순응하려는 대신 의학의 발전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만큼 의학과 의료 기술에 더 의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의료 기술을 이해하는 사회적 토대를 조성했고, 이제는 가능한 그리고 최대한 생명을 연장하려는 의료적인 노력들은 인간이 해야 할 의무이자 도리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고.

의사이자 호스피스 전문의인 야마자키 후미오는 현대 의료 시스템이 질병의 치료와 치유라는 본래의 담당 업무 이외에 죽음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면서 환자와 가족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3] 누구도 환자 당사자에게 죽음이 다가왔음을 말하지는 않으며 그저 나아지고 있다는 말이나 나빠지지 않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는 환자의 불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환자에게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고 후미오는 말한다. 오히려 이러한 회피는 환자 입장에서 의료진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 수도 있는데 몸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본인 자신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괜찮다고 둘러대는 의료진이나 가족의 말은 정작 환자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개입하고 준비할 여지조차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미오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고독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의료진은 치료 방법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가족에 의해 결정된다. 이 모든 과정을 겪은 후 최종적으로 환자가 죽고 나면 남은 가족과 의료진은 서로에게 그동안 ‘사투’를 벌이느라 고생했다며 인사를 주고받는다. 이 말에 정말로 고생하고 사람이 누구인지,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죽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에 대해서 그는 지적한다. 사실 죽음에 이르는 시간 동안 죽음과 대면하고 저항한 대상이 환자인지, 의료진인지, 그것도 아니면 가족인지 모호해지면서 겪는 혼란스러움은 결코 특별한 경우나 상황이 아니다. 한 번이라도 병원에서 타인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흔히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판이 2011년도라 십 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는 좀 더 달라졌을 수도 있고, 일본의 의료 시스템을 설명한 것이니만큼 우리나라의 경우와 다른 지점이 있을 테지만 의료 기관에서 당사자에게 직접 죽음을 공식화하는 경우는 흔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한림대 류머티스 내과 교수인 김현아는 죽음은 예방할 수 있는 병도, 고쳐야 할 질병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임을 강조한다. [4] 그러면서 이른바 ‘죽음의 의료화’가 보편화됨으로 인해 과거에 비해 죽음의 질은 오히려 나빠졌다고 지적한다. ‘죽음의 의료화’에서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 곳곳마다 죽음을 방어하기 위한 의료 기기가 투입되는데 그 기기에 몸이 적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신체에 약물을 투여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기계 투입이나 약물 투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환자 몸에서 자율성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기의 통제에 따르는 과정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환자의 몸은 자기 의지에 따라 통제하거나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숨은 쉬지만 스스로 쉴 수 없고, 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았다고도 할 수 없다. 의료 기술의 발달이 ‘장생’과 더불어 ‘불사’의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사망에 이르는 과정마다 의료 시스템과 의료진이 개입되면서 사망에 이르는 정상적인 신체의 변화 과정은 이제 비정상적으로 인식되며, 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것, 곧 죽음을 피하고 최대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이해되면서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 누구든지 공적 공간에서 말하거나 공론화할 수 없게 됨을 김현아는 비판한다.   

한편 죽음을 피하고 싶은 또 하나의 주체는 바로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이다. 연명 치료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간절함과 최대한 죽음을 방어함으로써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한 가족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다. 문제는 죽음 앞둔 상황에서 치료 여부 또는 방법을 선택하는 건 환자 당사자가 아닌 보호자인 가족인 데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당사자가 스스로 치료의 방법이나 지속 또는 중단 여부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만약 가족이 치료 중단을 선택했을 경우 환자 당사자는 버림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5] 치료와 중단 모두 환자 당사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는 소외감만 들게 하고 가족은 가족대로 치료와 중단을 임의로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선적으로 이 죽음은 누구의 죽음인지를 가장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의 출발을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적어도 병원에서의 연명 치료만을 오로지 죽음의 종착지나 최선의 방법으로 선택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죽음은 탄생만큼이나 존중해야 하고 또 존중받아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다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자기 결정권을 주장할 권리가 분명히 있으며, 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 역시 그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배우자란 이유로, 부모나 자식이란 이유로, 또는 보호자란 이름으로 ‘지금’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자연스러운 죽음 대신 의료 시스템에 의지하며 생명 연장을 선택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결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에서 완화 치료 분야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는 캐서린 매닉스는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는 배제된 채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연명 치료에 기대다 결국 누워서 삶의 마지막을 마무리 짓는 것이 죽음 의식의 보편적 방식이 되어버린 것에 유감을 표한다. [6] 그녀는 개인의 삶의 질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뿐임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으레 병에 걸린 사람은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신체적 한계를 오래 사는 대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훨씬 많으며, 병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것을 외면하며 죽음을 마치 치료의 대상으로 삼아 병원에서 죽는 것을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현대 의학을 오해하도록 만드는 것 중에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     


비약적으로 발전한 의학 기술 앞에서, 그리고 지연되는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돈벌이의 수단이 되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당사자와 그 가족이 느끼는 공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죽음을 앞둔 당사자가 느끼는 공포다. 이것은 무엇보다 평화롭고 존엄하게 죽음을 준비하려는 그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서 비롯된 공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공포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방어하지 못했다는 비난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공포다. 그러나 중요한 건 비난이나 후회도, 죄책감도 아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멈추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 하는 사람의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외면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명 치료를 선택하는 대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가족들에게 함부로 들이대는 '비인간적'이나 ‘패륜’이라는 프레임 역시 결코 마땅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 내 옆에서 조용히 존엄하게 마지막 숨을 쉬고 싶다는 말을 듣고도 내 맘대로 그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인간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건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고 싶은 욕구를 지닌다는 것이다.[7]     


*참고문헌

[1]이창재, <프로이트와의 대화>, 민음사, 2004.

[2]이반 일리치, <병원이 병을 만든다>, 미토, 2004.

[3]야마자키 후미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잇북, 2020.

[4]김현아, <죽음을 배우는 시간>, 창비, 2020.

[5]오타케 후미오, <왜 환자들은 기적에만 매달릴까>, 사계절, 2020.

[6]캐스린 매닉스,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뜰 수 없겠지만>, 사계절, 2020.

[7]이창재, 위의 책.     




*이 글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 3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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