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섯 살 되던 해 아빠는 다방 여자와 바람이 났고, 엄마와 이혼했다. 참을성 없는 아빠는 이혼도, 새살림도 속전속결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혼 서류를 내미는 아빠에게 엄마는 제발 이혼 도장만 찍지 말자고, 나가 살아도 좋고,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서류만큼은 나중에 애들을 위해서라도 건드리지 말자고 아빠를 붙잡고 싹싹 빌었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사랑에 빠진 아빠에게 엄마는 그저 빨리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아빠는 혹시라도 ‘사랑하는 그 여자’가 그 잠시를 못 참고 떠날 까 봐 애가 탔는지 엄마에게 이혼 서류를 들이민 다음날 신혼집의 보증금을 빼서는 집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엄마도 이모들이 있는 대구로 내려갔다.
아빠가 집을 나간 그날의 풍경과 감정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엄마가 언니와 나를 두고 집을 떠난 날의 기분이나 감정은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엄마가 떠나 마지막 모습만 유독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엄마는 특별한 이별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난 듯하다. 엄마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울거나 같이 가겠다고 때를 쓰며 운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평상시에 그랬듯이 시골에 가서 할머니랑 열 밤 자고 있으면 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시장에 갔다고 온다고 하고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리란 짐작만 할 뿐이다.
어렸을 때도, 또 지금 생각해도 말없이 떠난 그때의 엄마가 밉거나 원망스럽진 않다. 엄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을 거다. 치욕으로부터, 죄책감으로부터, 그리고 책임질 수 없는 자식으로부터. 이 모든 무게와 감정을 외면할 만큼의 뻔뻔함도, 강인함도 없었던 보통의 여자였던 엄마니까. 어떤 사람은 모성애도 책임감도 없는 나쁜 엄마라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도망친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 그저 엄마 자기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또 고맙게 생각한다.
누구에게는 남편이 바람 난 것쯤이야 대차게 욕 한번 하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일 지도 모른다. 그깟 남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그러나 문제는 남편이 아니라 믿음을 의심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이다. 직접 당해본 사람들은 안다.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과 버림을 동시에 당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넘어 나 자신까지도 무력하고 쓸모없게 만든다는 것을. 그 사람을 믿은 내가 너무나 병신 같고 쓰레기 같다는 마음을 이긴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은 힘내랍시고 다 잊으라고, 악착같이 살아서 남부럽지 않게 살면 된다고들 말하지만 그 말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데 악착같이 살아서 뭐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서 또 뭐 할까, 싶은 마음이 더 크기에. 엄마는 엄마의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지 못할 것을 두려웠기에 우리를 두고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을 나간 아빠는 내연녀와 새 살림을 차렸다. 내연녀에게는 언니와 동갑이기도 했던 딸이 있었기도 했고 아빠는 언니와 나까지 부양하기엔 처지도 능력도 변변치 않았는지 그녀의 딸을 선택하고 우리를 포기했다. 하지만 엄마가 언니와 나를 두고 나간다는 통보를 들은 아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나와 언니를 할머니가 계신 큰집에 보내 놓고선 거기서 잠깐 지내라고 했다. 하지만 큰집은 이미 고등학생인 사촌 오빠 셋과 언니만으로도 벅찼고, 오빠와 언니들에 비해 나와 언니는 너무나 어렸던 탓에 귀찮은 업둥이에 불과했다. 큰엄마는 아빠에게 언제 애들을 데리고 갈 건 지 수시로 연락을 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아빠는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나와 언니를 데리고 올라오라고 했다. 아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건 책임감이 아니라 귀찮음이었다. 우리는 아빠에게 귀찮은 존재였고, 그 귀찮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귀찮은 존재들은 어디를 가서도 귀찮은 존재가 된다는 걸 아빠는 몰랐는지 언니와 나는 가족이 다시 결합하는 직전까지 모두에게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다.
아빠가 사는 집에서 나와 언니, 새엄마가 된 내연녀, 그녀의 딸은 일여 년 정도 함께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여 년의 시간 동안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난다. 원치 않는 남의 자식을 둘이나 키워야 했던 내연녀, 엄마와 이혼하면 행복할 줄 착각한 아빠, 구박과 폭력이 일상화된 언니와 나, 새엄마의 딸까지. 물론 누가 이 지옥을 만들었는지 묻는다면 단 한 사람에게만 그 탓을 돌릴 수는 없을 테다. 욕망을 선택한 아빠도, 현실의 두려움에 도망친 엄마도,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나도 모두 공범이라면 공범이니까. 후회해봤자 각자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왜 배신해서, 왜 용기가 없어서, 왜 태어나서... “일 텐데 그딴 말을 하면 뭐할까. 태어났으니 사는 거고, 용기가 없으니 도망치는 거고, 마음이 있으니 사랑에 빠진 것뿐이라 체념하면 그만이다.
그 지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는 게 전부였다. 내가 흘리는 눈물에 이유를 달자면 백 개도 달 수 있겠지만 엄마가 보고 싶다, 와 같은 마음은 없었다. 그보다 적응할 수 없는 낯선 환경과 돌아갈 원래의 곳이 없어졌다는 공포가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러나 내 눈물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가 운다 한들 달라지는 것도, 좋아지는 건 더 없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새엄마의 협박과 폭력은 점점 늘어났고 더 세졌다. 새엄마는 아침저녁으로 소리 없이 우는 나를 보면서 아빠가 나가길 기다렸다가 참았던 짜증을 터뜨리며 내 머리채를 잡고 발로 때렸다. 때리는 것도 싫을 때는 꼴 보기 싫으니까 장롱에 들어가서 손에 베개를 들고 있으라고 했다. 너 때문에 내가 이 아침부터 짜증을 내야겠냐고. 장롱 안에서도 우는 소리가 계속 들리면 영영 못 나올 것이라고 협박도 했다. 나는 벌을 서지 않으려면, 덜 맞으려면 새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의 마음에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덜 혼나고, 덜 맞으니까. 그러나 나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나는 어떻게 해도 그저 혼나는 존재, 딱 그만큼이었으니까.
티브이나 신문에서 아동학대 기사를 보면 사람들은 으레 아이들이 당했을 폭력과 그것을 견뎌내었을 아이의 고통에 대해 분노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부모가 가한 폭력 그 자체보다 그것도 부모랍시고 미움받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애쓴 아이의 모습이 먼저 떠올라 화가 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를 때리는 사람이, 폭력의 공포에 몰아넣는 사람이 나의 부모라면, 그런데 나를 입히고 먹이고 살게 해주는 사람도 역시 부모라면 아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힘이 없어서도, 저항할 줄 몰라서도 아니다. 아이는 혼자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맞으면서라도 삶을 지속하는 게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죽는 것보다 차라리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 옆에서 사는 게 덜 무섭다고 생각하는 게 아이의 본능이다. 어렸을 적부터 폭력에 노출되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나는 맞(아야 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규정한다. 이 공포 안에서 아이가 품을 수 있는 희망이란 기껏해야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덜 맞는 것, 덜 아프게 맞는 것’ 정도다. 적어도 내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땐 그렇다. 나를 때린 부모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 후에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미움과 증오의 감정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을 이겨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그만큼 또 필요하다. 아이가 독립을 꿈꿀 만큼 성장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조금이라도 실수하지 않고 덜 맞기 위해 애쓰는 것, 이게 아동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이 가지는 마음이다.
아무튼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고, 새엄마는 자기 딸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남의 딸을 둘이나 키우긴 힘들다며 연신 아빠를 닦달해댔다. 어떻게 해서든 애들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고. 남의 자식 키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고. 자기 자식이 아닌 아이를 자기 호적 서류에 넣는다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아도, 자기 자식을 남의 손에 키운다는 게 어떤 불행을 낳는지는 알지 못했던 아빠는 그 닦달을 견디지 못하고 엄마와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해서 아빠는 언니는 엄마에게, 나는 할머니에게 보냈다. 왜 나와 언니를 함께 보내지 않았는지, 엄마는 왜 언니만 데려갔는지, 왜 나는 할머니에게 보냈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이혼녀의 낙인만으로도 괴로운 엄마가 아이 둘을 데리고 키운 다는 건 현실적으로 버거운 일이었겠지,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아이 둘 모두를 엄마에게 맡길 수 없었던 아빠는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나를 할머니에게 보냈겠지, 하는 정도다. 분명한 건 나를 선택하지 않은 엄마를 원망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거다. 엄마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에게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엄마도 아빠도, 누구에게도 선택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갈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와 살게 된 처음 그날처럼 다시 큰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골로 내려갔다. 엄마가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지만 엄마와 헤어졌던 그날의 감정이나 엄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할머니에게 돌아갔던 그날은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시골집을 떠난 사이에 그새 커서 새끼를 낳은 복실이와 복실이의 새끼들도 기억이 난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하고 복실이 뒤만 졸졸 쫓아다녔던 새끼 강아지들. 내가 올 때까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내 손을 쥐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복실이는 낯선 내가 행여 자기 새끼를 해할까 겁이 났는지 연신 나를 보고 짖어댔다. 그러자 할머니는 벽에 세워 놓았던 부지깽이를 들고서는 행여나 복실이가 나에게 해코지를 할까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한 손으로는 나를 끌어안으셨다. 나는 그 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를 버리고, 혼내고, 때리는 사람은 있었지만 나를 안아주는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했으니. 내 기억 속에서 나를 안아주었던 첫 번째 사람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 할머니였다.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그날 이후로 나는 아침마다 눈물을 흘릴 일도 없었지만, 맞지 않기 위해 눈물을 참을 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