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거기서 내 목소리 들리나요?

프롤로그



1910년에 태어난 나의 할머니는 열아홉 살에 중매로 옆 동네 사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가서 딸 셋과 아들 여섯을 낳으셨다. 팔 남매 중 나의 아버지는 막내였는데 전쟁 통에도 애는 나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할머니는 6.25 전쟁이 터진 이듬해인 1951년 봄에 아버지를 낳으셨다. 꽃다운 스무 살부터 마흔둘의 나이가 되도록 아홉 번의 자식을 품고 있었으니 그 몸이 얼마나 축이 났을지는 상상한다고 해도 그저 내 고통의 범위 안에서나 가늠할 뿐 이루 설명할 수 없을 듯하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배속에 품고 있을 때는 한창 전쟁 중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고는 총으로 위협하며 못된 짓거리를 했는데 할머니는 배속에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군인들한테 덜 맞았다고 한다. 그때 끌려간 사람 중에는 끔찍한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는데 생사를 넘나드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할머니와 아빠는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그날을 기억을 더듬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마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늘 고마워했고, 때되면 해야 하는 고해성사 하듯이 고맙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도 막내 네 덕분에 그 전쟁 통에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허나 뱃속에서도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태어나서도 지금까지 평생을 가난 속에 살게 해서 이 애미가 낯짝을 들 수 없을 만큼 미안하다고.


할머니의 이름은 조, 차 瑳 희姬. 고운 여자라는 뜻처럼 할머니는 참 고왔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침마다 머리를 빗고 주변을 단정히 정리하는 걸 한 번도 빼먹지 않으셨다. 대개 나이가 들고 몸을 마음대로 가꿀 수 없는 처지가 되면 할머니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길게 길러 쪽진 머리를 짧게 잘라버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늙고 병들면 먹고 자는 것 말고는 대부분의 일상을 남의 손을 빌릴 수 없게 마련인지라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손이 덜 가게 해주어서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일 테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본 대다수의 할머니들은 자신의 몸이 버겁다 느껴질 때쯤엔 마음에도 없는 세상 귀찮아서, 라는 이유로 길게 길러 쪽진 머리를 짧게 잘라 버리곤 했다. 그러나 나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긴 백발의 쪽진 머리를 그대로 유지하셨다. 힘들고 불편해도 오로지 본인 손으로 스스로 머리를 매만지고 몸을 닦고 주변을 가꾸셨다. 쪽진 머리와 비녀는 할머니의 자존심인지 아니면 고집인지는 알 리 없지만 병원에 실려 가시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곱게 쪽진 머리는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꼼꼼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 치매에 걸리기 쉽다는 풍문을 근거로 할머니가 혹시나 치매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할머니는 본인이 지키고자 했던 기억들과 일상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본인의 몸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신 채 곱게 돌아가셨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가장 싫어하셨던 할머니다웠다.


할머니가 태어나고 자랐던 그 시절의 여자들 인생이야 다들 비슷했겠지만 할머니의 팔자는 순탄치도 윤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에게 가난은 할머니 삶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배경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난을 이기려는 생각은 오만에 가까웠고 다만 오늘보다 내일은 덜 가난하기만을 바랐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난은 늘 그렇듯이 ‘한’이란 친구를 할머니 옆에 데려다 놓았다. 병으로 일했던 날보다 누워 있던 날이 더 많았던 남편, 전쟁 통에 헤어져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큰아들, 돈이 없는 탓에 병원을 데리고 가지 못해 평생 한쪽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어 ‘파란대문 집 눈 병신’으로 불리게 된 둘째 아들, 고생 안 시킬 남자라는 말에 속아 시집보냈는데 자식 딸린 홀아비의 후처 자리였던 걸 시집간 다음날 알게 된 큰딸, 알코올 중독 남편을 만나 평생 두들겨 맞다 약을 먹고 자살한 셋째 딸은 가슴을 후려쳐도 내려가지 않을 한이었다.

나는 다섯 살에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아빠는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났고, 엄마와 이혼했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이혼하자마자 아빠는 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참을성 없는 성격을 가진 아빠는 이혼도, 재혼도 속전속결이었다. 이혼 서류를 내미는 아빠에게 엄마는 따로 살아도 좋으니 제발 이혼 도장만 찍지 말자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으니 제발 이혼만 하지 말자고 아빠를 붙잡고 싹싹 빌었지만, 아빠는 그 여자가 아빠를 버리고 딴 놈한테 도망이라도 갈까 두려웠는지 다음날 신혼집의 보증금을 빼서 집을 나갔다. 그리고 나는 아빠도 엄마도 아닌 큰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골로 내려갔다. 아무도 나를 책임지지 않으려고 나를 내돌렸지만 유일하게 나를 안아준 건 할머니였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와 가난하지만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내가 누렸던 가장 큰 호강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에게 만약 할머니가 없었다면, 엄마 아빠를 잃고 할머니 손에서 길러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음은 분명하다. 내가 이만큼 성장하고 무탈하게 살 수 있었던 건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 안타까움, 감사함, 그리움, 간절함, 죄책감과 같은 감정들을 단단하게 섞고 또 섞어 이것을 콘크리트 삼아 나만의 길을 만드는 데 재료로 썼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껏 밟아 온 길, 그리고 앞으로 밟고 지나야 할 길이 오로지 할머니의 사랑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책임감으로 만들어진 길이라고 생각하면 어디 하나 무심하게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발길에 차이는 돌조차도 할머니가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 번 들여다보게 되고 더 조심하게 되니 말이다.

가진 건 없지만, 앞으로도 지금보다 크게 나아질 것 없는 평범한 인생이지만 적어도 할머니가 나에게 남긴 마음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살아가다 보면 이 세상에 고맙고 소중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으로 몇 편에 걸쳐 할머니를 기억하는 글을 남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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