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과 불행 사이
아빠의 사랑은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났다. 아빠와 새엄마 중 누구의 마음이 먼저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그게 누구이든 나에겐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서로에게 더는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변하지 않는 아빠의 월급은 새엄마의 사랑을 얻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씀씀이도 크기도 했고 당시 사춘기에 접어든 딸에게 들어갈 돈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다른 사람이 그랬듯이 새엄마도 가난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의 사랑이, 엄마의 희생이 가난을 버티게 해준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사랑은 가난도 이길 수 있는 것”을 진리라고 착각하며 살아온 아빠는 비로소 새엄마를 통해 가난을 이기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아빠는 자존심이 상했고 ‘월급쟁이’를 팽개쳤다. 명분은 사업을 시작해서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는 것, 그래서 가난도 이기고 사랑도 받겠다는 것. 그러나 천성이 나약하고 끈기가 없는 아빠는 늘 뜬구름만 쫓아다니며 마음을 잡지 못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건 없었고,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았다. 그 모습이 꼴 보기가 싫었는지 새엄마는 다시 다방으로 출근했다. 아빠란 존재는 더는 새엄마에게 참고 버틸 만큼 기생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자기 딸이 ‘아버지’란 이름과 호적을 갖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았지만 생활은 또 다른 문제라, 다시 기생할 만한 대상을 다시 찾아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새엄마는 아빠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해관계로 시작한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더 얻지 못하게 되는 시기를 맞닥뜨리게 되면 선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지속해야 할지, 아니면 끊어야 할지. 아빠와 새엄마 사이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연결해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관계였다. 사랑이야 다시 찾으면 되고, 딸의 아빠는 다시 만들어주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갈라섰다. 하지만 둘의 기대와 달리 아빠는 새로운 사랑을 찾지 못했고, 새엄마 역시 딸을 호적에 올려줄 남자를 찾지 못했다. 몇십 년이 지난 아직도 새엄마 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거로 봐서는 말이다.
아빠는 엄마와 이혼하고 새엄마에게 갔을 때만 해도 신혼집 보증금도 월급통장도 들고 갔지만, 이제는 살 집도 쥐꼬리만 한 월급도 없는 ‘조강지처 버렸다가 천벌 받은 홀아비’가 되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혼자 보냈는지 모르지만, 아빠는 엄마에게 이혼 후 처음으로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엄마는 짐을 싸고 언니와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를 탔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한 후 외갓집이 있는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이모들이 사는 시내에 방을 구해 살았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볼 염치도 없었겠지만 수치스러움이 더 컸다. “중학교도 못 배운 것”이 서울 좋은 것만 알아서 내빼더니 못된 연애질이나 배워서는 결국 ‘인생 결딴났다’는 비아냥 섞인 걱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8남매 중 유일하게 ‘서울 물’을 먹은 엄마는 ‘여자는 밖으로 돌리면 결국 결딴난다’는 말의 가장 만만한 예가 되었고, 자존심이 셌던 엄마는 ‘아직 결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서울 물’ 먹으며 배운 기술로 읍내 양장점의 시다로 취직해 이모들에게 언니를 맡긴 채 밤늦게까지 일하며 기를 쓰고 돈을 벌었다. 물론 월급이라고 해봐야 한 달 생활하기도 빠듯했지만 엄마는 한달도 빼먹지 않고 저축을 했고, 그렇게 모은 돈은 엄마와 아빠가 재결합하고서 함께 살 집의 보증금이 되었다. 그럴지 없겠지만 엄마는 이 돈이 여기에 쓰일 줄 알긴 알고서 모았을까.
물론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돈을 모았는지 알 길은 없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엄마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빈털터리가 되고, 정신이 들면, 자기가 저지른 일만큼 당하고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면 아빠는 그때 엄마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 엄마에게 아빠는 너무나 투명한 사람이었다. 못된 짓은 해도 거짓말은 못 하는 덜 자란 어른이란 것, 연민과 정으로 태어나고 정으로 살아온 사람은 정을 주고받을 곳이 사라지면 본능처럼 첫정을 받았던 곳을 찾아간다는 걸. 엄마의 예상은 적중했다.
엄마가 모은 돈은 혼자서 모은 것치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시 한복판에서 전세 보증금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부엌이 딸린 방은 둘째 치고 주인집과 분리된 집을 얻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구한 집은 18평짜리 아파트에 딸린 방 칸이었다. 주인집 아줌마는 방 한 칸만 돈을 받고 거실과 부엌을 함께 쓸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거기서 두 번째 살림을 시작했다. 그리고 언니는 새엄마와 살았던 몇 개월을 제외하고는 쭉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던 덕에, 그리고 아빠에게 대한 기억이 나보다는 많았기에 셋은 이물감 없이 가족으로 묶일 수 있었다.
세 사람이 가족이란 울타리를 다시 만들고 함께 산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빠는 큰어머니에게 연락해 나를 데리고 와도 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에게 왔었던 그 날처럼 큰어머니의 손을 잡고 큰집을 떠났다. 터미널로 가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할머니는 잘 지내라고, 한 달 보름만 자면, 지금은 너무 바쁘니 모종심고 씨 뿌리는 것만 얼추 끝나면 할머니가 큰오빠랑 기차 타고 갈 테니까 아빠와 엄마랑 잘 지내고 있으라고, 치마 허릿단 안쪽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천원을 꺼내서 내 바지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나는 쓸데없이 울지 않았다. 할머니는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찾아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할머니와 사는 동안 나를 보려고 큰집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조만간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 아빠조차도. 하지만 나 역시 단 한 번도 엄마나 언니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아빠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 해 본 적이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들 하지만 그건 그냥 피는 피끼리 섞이고, 물은 물끼리 섞이는 자연의 성질 때문이지 피가 물보다 무엇이 더 나아서도, 좋아서도 아니다. 오로지 혈연이라는 끈으로 나와 엄마 아빠, 그리고 언니를 묶기엔 나는 오랜 시간을 다른 곳에서 보낸 아이였고 가족이란 이름은 내가 할머니와 살 수 없게 만드는 작은 폭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불러도 오지 않는 사람이었고, 엄마란 말은 내뱉는 동시에 새엄마의 폭력적인 모습이 겹쳐져 부르기가 무서웠다. 그런데 이제 다시 할머니가 없었던 그때, 다시 엄마와 아빠와 살아야만 하는 그때로 돌아가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썩 다행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 넷은 가족이란 끈으로 다시 묶이긴 했지만, 남들과 같은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각자가 고통스럽게 보냈던 지난 몇 년의 시간을 지워야 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모르는 척,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는 척하는 것이었다. 왜 흩어져 살아야 했는지, 그리고 왜 다시 모였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혼, 바람, 새엄마, 그리고 할머니는 금기어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참 무책임하고 또 폭력적인 행동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책임 대신 사랑을 선택한 것도, 언니를 선택하고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도 사과를 해야 했다.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사과도, 변명도 하다못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침묵했다. 어른의 세계는 그저 자기만 모른 척, 아닌 척 애쓰면 다 잊을 수 있다고 믿는 이기적인 세계에 불과했다. 아이들에게는 작은 잘못을 해도 무릎을 꿇리고, 훈육이랍시고 폭력조차 정당화하면서도 정작 어른인 자신은 ‘인생이 내 맘대로 안되더라’는 핑계로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 대해 침묵하는 비겁한 어른의 세계.
우리 가족이 재결합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불행하게도 아침에 일어나면 우는 습관이 다시 생겼다. 새엄마와 살면서 생겼던 습관이 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눈뜨면 할머니가 없는 게 너무나 슬펐다. 하지만 소리 내서 울면 혹시나 또 그때처럼 혼날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리면 옆에서 자고 있던 언니가 일어나 내가 운다고 눈치도 없이 엄마에게 일렀다. 물론 엄마는 새엄마처럼 나에게 욕을 하거나 때리지 않았다. 다만 나를 안아주거나 다독이는 대신 언니를 데리고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그만큼이었다. 나도 엄마가 어색했지만 엄마 역시 나를 어려워했다. 겁이 많았던 엄마는 나의 상처를 똑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위로해주지도, 안아주지도 못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울면 울게 내버려 두는 것, 혼자 있을 땐 외로운 채로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무관심으로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하지만 언니와 엄마가 들어간 방문은 닫혔고 나는 다시 혼자 남았을 때, 주변은 다시 조용해지고 혹시나 누구라도 있을까 싶어 머리끝까지 올려 썼던 이불을 슬쩍 내려 주변을 봤을 때,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밀려오는 서운함과 헛헛함은 어린 내가 받아들이기에 꽤 컸다. 밤이 되면 언니는 무섭다고 가끔 아빠와 엄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자곤 했다. 그럼 나는 혼자 남아야 했는데 깜깜한 밤이 무서워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할머니가 없었으니까. 엄마는 할머니가 아니었으니까. 할머니가 아니면 나에게는 옆에서 자고 있는 주인집 아이들이나 엄마나 언니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누구든 별 상관없는 남.
주인집 가족들과 아빠는 출근하고 마지막으로 언니가 학교에 가고 나면 집에는 엄마와 내가 남았다. 엄마는 라디오에 들어가는 부품을 손질하는 부업을 했고 나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돌아오는 저녁까지는 오로지 엄마와 나는 꼼짝없이 함께 있어야 했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놀 사람도 없던 나는 방 앞 베란다에 앉아서 밖을 쳐다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뭘 보려고 한 건 아니었다. 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시골집 마루에 앉아 복실이랑 놀기도 하고. 할머니와 뒷산으로 산책도 하러 가고, 마을 회관에 따라가서 할머니들한테 과자 얻어먹는 게 일과였는데 여기서는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할머니처럼 항상 나를 옆에 끼고 다니지 않았지만 나도 엄마와 함께 나가는 건 영 어색했다.
어느 날, 오랫동안 베란다에 앉아 밖을 구경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던 엄마가 말을 걸었다.
“할머니가 보고 싶어?”
처음으로 엄마가 나에게 할머니에 관해서 물었다. 나는
“아니”
라고 말했다. 정을 못 붙이고 겉도는 나를 보며 걱정하는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부끄러워서 아니라는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누가 봐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엄마는 더 묻지 않았다. 엄마는 늘 그랬듯 무관심으로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방에 들어가 부업에 열중했고 나는 다시 베란다 밖을 구경하며 하염없이 할머니 생각을 했다.
그때도, 지금도 엄마는 한 번도 나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그 시절에 내가 새엄마와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할머니와는 어떻게 지냈는지, 혹시나 모난 돌이 되어 큰집 식구들 발에 채진 않았는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엄마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새엄마에게 얼마나 맞으며 지냈는지, 그때 흘린 눈물이 얼마인지. 그리고 할머니에게 가서 얼마나 즐겁게 지냈는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할머니와 얼마나 많은 추억을 만들었는지. 하지만 행여 나의 기쁨을 알려면 어쩔 수 없이 슬픔도 알아야 할 텐데, 엄마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 용기가 업어서 차라리 모든 걸 모른 척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상처는 함부로 들추면 안 된다는 것. 그건 엄마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의 재결합은 두 사람을 걱정하고 마음 썼던 많은 사람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위가 다방 레지와 바람나서 딸이 이혼당했다는 소문 때문에 동네 얼굴도 못 들고 다녔던 외할아버지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타지에서 혼자 가슴을 쥐어뜯을 딸 걱정에 눈물 흘렸던 외할머니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막내아들이 사람 구실 못하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는 만든 건 자식 잘못 기른 내 탓이라고 자책했던 할머니에게도 다행이었고, 원치 않는 업둥이를 돌봐야 했던 큰집 식구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엄마와 아빠의 재결합은 다행도 그렇다고 불행도 아닌 그저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물론 세상이 말하는 정상적인 가족이 생겼다는 건 다행일지 모르지만 더는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건 불행이었다. 누구와 살든 할머니는 지워지지 않는 큰 그림자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