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제사상을 엎었다

큰아버지의 별명은 ‘파란대문집 눈 병신’이었다.

젊은 시절, 큰아버지는 사고로 눈을 심하게 다쳤는데 큰 병원으로 가기엔 시간도 돈 없어 읍내 작은 병원에 가서 급한 대로 응급처치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무엇보다 눈을 감을 수 없어 계속 눈물이 흘렀고, 그 눈물을 닦아내느라 눈 밑이 늘 짓물렀다. 하루라도 빨리 큰 병원으로 가서 치료해야 했지만 이번 추수가 끝나면, 바쁜 것만 지나면, 돈이 들어오면, 하면서 차일피일 치료를 계속 미뤘고, 결국 돈이 들어왔을 때쯤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 결국 눈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로 큰아버지는 평생 한쪽 눈을 감지 못한 채 살아야 했고, 돌아가실 때도 온전히 두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큰아버지는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했다. 부지런함을 유일한 재산이라 생각하며 소처럼 일만 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가난은 단 한 번도 그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지만, 큰아버지는 오로지 굶지 않고 싶다는 마음으로 몸을 쉬지 않았다. 가난하고 볼 것 없는 집안이지만, 키도 작고 왜소해서 남자다움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착하고 성실함을 알아본 동네 어르신은 큰아버지 중신에 나섰고 덕분에 큰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 셋과 딸 하나를 얻었다. 어느 자식 하나 귀하지 않은 자식이 없었지만 첫째 아들에 대한 큰아버지의 애틋함은 동네 소문이 날 만큼 끔찍했다. 큰아버지는 아침마다 큰아들을 빈 달구지 위에 앉혀놓고는 소를 몰며 일하러 들에 나갔고, 저녁에는 달구지에 가득 쌓아 올린 소꼴 위에 큰아들을 태우고 온 동네에 아들 자랑하듯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 큰아버지를 보면 동네 사람들은 자식밖에 모르는 반 푼이라고 농담해댔지만 자기 자식을 귀하게 여기고 끔찍이 아끼는 큰아버지의 마음을 비웃지는 못했다.

큰아버지는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참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큰형마저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었고 막내마저 젖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죽자 할머니는 한동안 정신을 놓고 살게 되면서 그 성격이 더 짙어졌다고 한다. 아버지와 큰형을 잇달아 잃고 어머니마저 반 미친 사람이 되어 집안은 엉망이 되었다. 결국 큰아버지는 스무 살도 안 되어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맏이가 되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보다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그리고 여덟 명의 입과 가난을 동시에 떠안게 되면서 없던 말수가 더욱 줄어든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싫다고 거부한다고 한들 절대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이란 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질기도 또 질긴 듯 하다.




셋째 고모가 죽은 이후로 할머니는 큰아버지와 자주 싸웠다.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는 큰아버지에게 날이 서 있었고 큰아버지는 예전처럼 할머니를 향해 말을 아끼지도, 화를 참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끝내 고모의 두 아들을 모른 척하고 돌려보낸 큰아버지를 보며 대놓고 원망했다. 할머니는 그 아이들이 고아가 될 것이 뻔한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기어이 애미 없는 집으로 돌려보낸 큰아버지를 향해 제 새끼는 아까워 어쩔 줄 모르면서 남의 새끼는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게 먼저 간 동생에게 할 짓이냐며 비난했다. 할머니는 제 자식만 소중히 여기는 큰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숨기지 않은 채 쏟아냈고 그럴 때마다 큰아버지는 내 새끼도 못 먹고 못 입히는데, 집에 있는 저 업둥이도 데려간다고 한 지가 언제인데 데려갈 생각은 하지도 않아 벅차 죽겠는데, 무조건 자식 일이라면 끌어안고 보는, 생각도 양심도 없는 노인네라고 할머니를 비난했다. 큰아버지가 화를 내면 큰어머니와 언니는 싸움을 말렸지만 늘 마지막엔 큰아버지 편이었고, 그때마다 나는 할머니의 치마폭만 붙들고서 할머니를 공격하는 모든 사람은 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비난과 원망을 퍼붓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때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언제든지 상대방을 찌를 가시가 준비를 준비했고, 동시에 서로의 가시에 찔려 난 상처들은 사라질 시간도 없이 또 생기기 바빴다.


그날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큰아버지는 오일장에 새벽같이 가서 제사상에 올릴 음식 재료를 장을 봐왔고, 큰어머니와 언니는 온종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내내 부엌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그래서 있어봤자 별 도움도 안 돼 옆에 있으면서 자잘한 심부름이나 하면서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는지 살펴보는 게 일이었다. 그중에는 노란 등을 한 작은 조기 서너 마리도 있었는데 나는 물컹물컹한 것이 신기해서 괜히 눈도 찔러보고 배도 꾹 눌러보고 꼬리도 만져보며 조기를 못살게 굴었다. 그러다 멀찍이서 음식을 하고 있던 큰어머니한테 혼이 났다. 제사상에 올릴 생선인데 조기 눈을 그렇게 찔러 놓으면 제사상에 어떻게 올리느냐고. 기지배가 어째 천지 분간을 못하냐고. 별것도 아닌데 욕을 먹은 게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남은 조기 두 마리마저 몰래 눈을 푹 찔러 앞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놓고는 마당으로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조기가 그날 밤 당한 것에 비하면 내가 한 짓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소대로였으면 제삿날에는 옆 동네 사는 고모들도, 서울에 사는 작은아버지도, 그리고 새살림을 차린 아빠도 모두 왔어야 했지만, 그날 제사에는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셋째 고모 초상 때도 그랬듯이 다들 먹고 사는 걸 핑계로 껄끄럽고 불편함을 마주해야 하는 자리에는 끼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손님 없이 큰집 식구들만 모여 조촐한 제사를 끝냈고 식구들은 늦은 저녁밥을 먹었다. 늘 그랬듯 할머니와 나, 큰아버지가 함께 한 상에서 밥을 먹었고 다른 상에선 오빠들과 언니, 큰어머니가 밥을 먹었다. 늘 그랬지만 다들 밥상 앞에서 말이 없었다. 그나마 큰어머니가 오빠들에게 말을 시키면 오빠들은 대답도 하며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그날은 더욱 말이 없었다. 큰오빠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내일 아침 기차로 서울에 올라간다고 말을 꺼냈고 그날 사단은 시작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훤칠했던 큰오빠는 큰집의 자랑이었다. 오빠가 대학 본고사까지 붙은 날 드디어 우리 집안에도 드디어 귀한 대학생이 나오게 됐다며 식구들과 친척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축하해주었지만 결국 오빠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선택했다. 큰오빠가 조금만 이기적이었다면, 오로지 자기만 생각했다면 집에 한 마리 있는 소라도 팔아보라고 큰아버지를 졸랐겠지만, 그러면 한두 학기 등록금이야 어떻게 해서든 마련할 수 있었겠지만, 4년 동안 내야 하는 어마어마한 등록금은 큰집 형편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액수인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큰오빠는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직을 선택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 서울에 있는 호텔에 취직이 되어 내일이면 큰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제일 속상해한 건 역시나 큰아버지였다. 돈이 없어 병원도 못 가 눈병신이라 불리게 되었어도 그저 자기 팔자려니 하고 살아왔지만, 또다시 그놈의 돈이 없어서 다 줘도 아깝지 않을 자식 역시나 꿈을 포기하고 아무도 기댈 사람 없는 서울로 돈 벌러 가는 자식 앞에서 할 말은 없었다. 부모가 되어서 하는 위로랍시고 네 팔자니 어쩌겠느냐며 팔자타령이나 하기엔 부모가 되어서 너무나 무책임한 말 같아 어떤 위로도 하지 못한 채 큰아버지는 며칠 동안 벙어리 가슴을 앓으며 속상한 마음을 꾹꾹 눌러 놓았더랬다.

큰어머니와 오빠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뒤로 한 채 큰아버지는 담배를 태우러 밖으로 나갔다. 큰아버지가 나가자 멀찍이 앉아 있던 할머니는 큰오빠에게 대학 같은 거 안 가도 사람 구실만 잘하면 된다고, 가서 돈 많이 벌라고, 많이 벌어서 고생하는 동생들 뒷바라지해 주라고, 그게 장남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큰아버지가 손에 담배를 끼운 채 방문을 벌컥 열고서는 할머니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얘가 왜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냐고, 내가 하면 될 일을, 부모가 하면 될 일을 왜 죄 없는 얘가 해야 하냐고, 가난한 부모 만난 것도 불쌍한데 왜 쓸데없이 내 아들한테 그딴소리 하느냐고 그동안 할머니에게 쌓아두었던 미움과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할머니도 지지 않았다. 너만 부모고 너만 자식 있는 거 아니라며,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어도 부모인데 네 자식 앞에서 해대는 그딴소리는 결국 나 들으라는 거 아니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니가 낳아도 니가 내 배에서 났으면 저놈도 내 새끼인데 나라고 저 귀한 놈이 아깝지 않겠느냐며, 평생 자식 마음으로나 산 니가 부모 마음이란 게 어떤 건지 알 리가 있겠느냐며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결국 소리 질렀다.


“부모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서 엄니는 자식이 약을 먹고 뒤졌다는데 가보지도 않고, 바람난 미친놈한테 그것도 자식이라고 싫은 소리 한번을 못 하고 버린 자식을 여기 데리고 와서 키워요? 그게 부모 마음이에요? 그럼 부모가 저질러 놓은 일 뒤치다꺼리 하는 게 자식이에요?”


큰아버지는 어떻게 될 것처럼 식식댔고 보다 못한 큰오빠는 큰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그만하시라며 말렸지만, 눈빛이나 목소리는 모두 할머니를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려워 할머니 뒤에 숨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격앙된 식구들의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은 모두 할머니를 향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더 구석으로 숨었다. 나라도 할머니 편이 되어 할머니를 지켜줘야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본 모든 어른은 화가 나면 무엇이든 때리거나 부수거나 둘 중 하나였고, 둘 다 겪어본 나는 벌어질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두려워했다. 나는 더 작게, 더 단단히 숨는다고 숨었지만, 할머니 뒤에서 숨어 있는 나를 보고는 큰아버지는 뭘 잘했다고 거기 숨어 있냐고 못된 년이라는 말과 함께 발로 내 허리를 걷어찼다. 그리고 큰아버지 발에 내가 할머니 옆으로 밀쳐진 순간 할머니는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애를 때리느냐며 소리를 지르며 앞에 있던 제사상을 엎었다. 제사 음식은 사방으로 쏟아졌고 방은 전쟁터가 됐다. 나 때문에 눈병신이 된 조기는 할머니 손에 한 번 들려 완전히 내동댕이쳐져서 너덜너덜해졌다.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사랑방으로 간 할머니는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돌아누운 할머니가 걱정되어 옆에 앉아 있다가 방바닥에 늘어져 있는 할머니의 왼손을 잡았다. 화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지 할머니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이내 할머니는 뒤돌아 앉아서 손과 눈으로 나를 한번 쓸어보고는 맞은 데가 아프지 않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아픈 것보다 무서웠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큰아버지와 할머니가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비난, 모든 식구가 할머니에게 쏟아붓는 원망, 그리고 그 모든 비난의 화살을 혼자서 받아내는 할머니. 그 자리에서 할머니 편은 아무도 없었다. 나조차도 할머니의 편이 될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럴 힘도, 용기도 없었지만, 더 솔직히 말하면 끼어들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식구이긴 했지만 언제든지 돌려보낼 업둥이, 그만큼이었다. 그 자리 있던 오빠들과 언니가 내가 큰아버지에게 발로 걷어차이는 걸 봤으면서도 큰아버지를 말리지도, 나를 위로해주지도 않았던 건 내 존재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나빠서도, 못 돼서도 하다못해 내가 마냥 미워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치 않는 업둥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에서 업둥이는 아무리 잘하고 온순해도 그 존재만으로 거슬리고 발에 차이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할머니라는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존재가 있는 한 나란 존재가 거슬린다고 잡아 뽑을 수도, 함부로 찰 수도 없기에 식구들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불쾌함을 꾹꾹 누르며 쌓아두었다가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은근슬쩍 옆에서 거들며 농담처럼 나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미움쯤은 나에게 대수롭지 않았다. 이미 새엄마에게서 충분할 만큼 받아본 미움이기도 하고 그래도 울음을 참는 것보다, 참아도 나오는 울음 때문에 맞는 것보다 백배는 나은 일이니까. 나도 그만큼 새엄마를 증오하고 미워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나에겐 할머니가 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 커다랗던 할머니가 모든 사람에게 공격받는 모습을 보니 그때 느꼈던 미움이라는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밉다고 해도 나를 때린 새엄마나 그것을 외면한 아빠를 증오했던 미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무서웠다는 진심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괜찮다고, 아프지 않았다는 말은 진심으로 할 수 있었다. 할머니와 나는 그날 밤 머리를 기대며 나는 할머니의 젖을 만지며 할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긴 밤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그날 할머니의 표정과 목소리와 그 떨림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그날 그렇게 화를 낸 건 부모 마음을 몰라주는 큰아버지의 괘씸함만은 아니었을 거다. 어쩌면 부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큰아버지를 보며 부모로서 배불리 먹이고 입혀주지 못할망정 졸지에 장남이라는 굴레를 씌어놓고서 아들의 발목을 잡고 차마 놓지 못하며 매달리는 어미의 치졸함과 비루함을 기어이 꺼내서 확인하게 만든 극단적인 상황들에 대한 분노였을 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이나 칠십이 다 된 그때나 한 치도 나아지지 않는 가난이, 내 배에서 아홉 명의 자식들 모두가 그저 평탄하길 바랐지만, 어느 한 명도 자신의 운명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걸 보면서 희망 없는 답답함과 두려움에 할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남은 삶을 버텼을까.

여든셋의 할머니 인생을 채운 건 가난, 연민, 안타까움, 용서,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원인인 업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 업은 본인에서 끝나지 못하면 어떡하냐, 는 두려움과 죄책감은 때로는 할머니를 강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나였고 나는 할머니의 강인함과 민폐를 모두 받으며 꿋꿋하게 버텼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셋째 고모가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