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고모가 자살했다

할머니는 스무 살부터 마흔둘이 될 때까지 아홉 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중 큰아들은 생사를 모르고 두 딸은 할머니보다 먼저 죽었다. 큰아들은 전쟁 중에 징집된 이후로 소식이 끊기는 바람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마흔둘에 낳은 막내딸은 태어나서 두어 해도 채 살지 못하고 열병으로 앓다가 죽었다. 그리고 셋째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첫째 아들은 마치 옛이야기의 주인공처럼 가족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동생들에게, 그리고 나의 할머니에게 첫째 형, 첫째 아들은 아버지만큼이나 큰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큰사람이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전사 통보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은 그 큰사람이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첫째 아들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보고 싶단 말도, 그립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라면 할머니와 형제들에게 첫째 아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기에 언제든지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 전설같이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자기 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막내딸과 셋째 딸은 어떤 이야기도 갖지 못하고 강제로 잊혀져야 했다. 막내딸은 너무 어릴 때 죽은 탓에 기억할 만한 것이 없기도 했고, 그때 시절이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이 많았던 만큼 시절을 원망 삼아 그저 명이란 제가 갖고 타고나는 것이라며, 타고난 제 명이 그것밖에 안 된 것뿐이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잊었다. 하지만 서른여덟에 죽은 셋째 고모는 그 가벼운 위로조차 금기시된 채 가족들에게 잊혀져야 했다. ‘미쳐서 제 명도 못 채우고 뒤진 년’이란 낙인은 죽어서도 셋째 고모를 따라다녔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애를 써본들 낙인을 지울 수 없었던 할머니와 가족들은 차라리 그 낙인을 덮으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셋째 고모의 존재 자체를 묵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셋째 고모는 할머니와 형제들에게 상처이자 금기어가 되어 강제로 잊혀졌다.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신식 차림에 얼굴이 고왔던 셋째 고모는 ‘얼굴값하고 논다’는 동네 사람들의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시절에 타지에서 남자를 만나 연애 결혼을 했다. 멀리 살기도 했고 시집가면 남의 집 사람이라는 말처럼 고모가 먼저 연락을 보내거나 친정집에 오기 전까지는 고모의 소식을 듣는 게 어려웠다. 그나마 뜸하게라도 편지를 보내 안부를 알렸던 고모가 한동안 연락이 없자 걱정이 된 큰아버지는 작정하고 고모네 집으로 찾아갔고 그날로 큰아버지는 고모가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었다.


셋째 고모는 남편의 폭력을 ‘얼굴값’으로 제대로 치르며 살고 있었다. 남편의 폭력은 일상이었고 고모의 우울함과 외로움은 그 폭력을 합리화했다. 잘 산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고 아프지 않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었다. 셋째 고모는 몸도 마음도 모두 아픈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몸이 아픈 건 알아도 마음이 아픈 건 알지 못했다. 피딱지는 때가 되면 떨어졌지만, 마음의 통증은 아무리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고모는 술에 의지해서 외로움과 우울함을 잊었다. 그러나 남편의 폭력과 고모의 우울 강도는 점점 세졌고 고모의 일상을 압도했다. 결국 술로도 세상의 고통을 잊을 수 없을 때쯤 고모는 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 지금이야 우울증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당시는 그저 정상이 아니면 모두 미친년으로 묶어버리는 현실에서 셋째 고모는 결국 미친년처럼 살다 가족도 자식도 버리고 그야말로 ‘얼굴값이나 하다가 술 처먹고 뒤진 년’이었다.

고모가 죽은 지 서른대여섯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가족들은 옛날이야기를 하다가도 셋째 고모가 등장할 때면 다들 말이 없어지거나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리곤 한다. 고모의 존재와 죽음을 말하긴 하지만 차마 자살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고모의 자살은 남겨진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자 팔자는 다 그런 것이라며 고통을 가볍게 여긴 것에 대한 죄책감, 네 팔자는 네가 만든 것이라고 외면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 무엇보다 그 어떤 이유로든 자식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셋째 고모를 쉽게 기억하지도, 그렇다고 잊게 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나는 고모가 죽은 그날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할머니가 우는 걸 보았던 날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세상 두려운 것 없는 씩씩한 할머니였지만 고모에게 할머니에게 자식이 제 명을 다 살게 하지도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둔 못난 어미였다.

그날 아침 할머니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지만 사랑방에서 나가지 않고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몸은 쉬지 않고 움직일 텐데 그날은 머리 매무새를 가다듬고 옷만 입고서는 그대로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큰어머니도, 오빠나 언니들도 평소와 다를 것 없었지만 다들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할머니는 아침도 점심도 먹지 않은 채 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사촌 언니는 그런 할머니를 두고 나에게 밥 먹으라며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큰엄마와 사촌 언닌 밥을 먹으며 조용하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셋째 고모가 죽었고 큰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거기에 갔다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약과 자살이란 말도 알아들었다. 예닐곱의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셋째 고모가 죽었다는 것이다. 밥을 먹고 할머니에게 갔을 때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가까이서 본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할머니는 숨소리 한번을 내지 않고 조용하게 울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할머니의 손은 떨고 있었다. 소리 내지 않는 우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줬다. 할머니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면 혹시나 내가 볼까 다른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나는 괜찮어.”


라고 내 손등을 토닥였다.

그날 사랑방에는 할머니의 괜찮다는 한마디 말고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물이 할머니의 슬픔에 집중하는 것처럼, 할머니의 소리 없는 눈물에 숨죽인 것처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할머니와 나는 소리 없이 셋째 고모와 영원히 이별했다.

다음날 큰아버지는 오후 늦게 돼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나보다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오빠 둘을 데리고 왔다. 둘은 낯선 곳이라 그런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큰아버지는 사촌 언니에게 오빠들을 데리고 들어가라고 했고 큰어머니는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왔니. 고생했다.”라고 말로 인사를 대신 했다. 사촌 언니는 이 오빠들을 잘 알고 있는지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사랑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사촌 언니 뒤만 졸졸 따라갔다.

어제부터 이때까지 사랑방에서 꼼짝도 안 했던 할머니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오빠들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오빠들의 손을 잡았다. 오빠들은 어색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내가 큰집에 처음 왔을 때 내 등을 쓸어주었던 것처럼 오빠들의 등을 쓸어주었고 잘 왔다고, 고생했다고 말했다. 오빠들은 죽은 고모의 아들이었다. 할머니는 오빠들을 눈에서 떼지 않았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마냥 쳐다보기만 했다. 혹시나 어제처럼 또 할머니가 울까 봐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내가 알던 씩씩하고 다정한 할머니로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큰어머니는 아직 저녁때도 아닌데 밥상을 차려 사랑방으로 들고 왔다. 상에는 아침에 먹고 남은 밥을 끓여서 그릇 세 개에 나누어 담겨 있었다.


“초상 치르느라 고생했을 텐데 먹어라.”


하고는 큰어머니가 말을 하고는 나갔다. 할머니는 오빠들 손에 숟가락을 쥐여줬다. 할머니는 큰어머니가 나가자 할머니 그릇에 있던 누룽지를 오빠들 그릇에 나누어 주었다. 오빠들은 조용히 꾸역꾸역 받아먹었다. 할머니는 상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다시 우두커니 앉아 오빠들의 등을 바라봤다. 어제보다 훨씬 평온했고 더 덤덤했다.

그 이후로도 할머니는 셋째 고모 때문에 적어도 남들 앞에서는 우는 일은 없었다. 셋째 고모가 그립지 않아서도 아니고, 미워서도 아니었을 테다. 다만 끝까지 지켜주지도 못하고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가 자식을 그리워할 자격이라도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 슬픔조차 사치라 그냥 가슴에 품고 덮어버리는 것이 셋째 고모를 애도하는 할머니만의 방식이었을 테다.



그때의 고모 나이가 된 나는 종종 생각한다. 만약 셋째 고모가 다른 고모들럼 가난을, 폭력을, 우울함을 운명으로 체념하며 적당히 참고 살았다면 제 명을 온전히 다 채우며 살 수 있었을까. 그것을 다 견디고 제 명을 살아간다면 그건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자식이 만신창이가 되어 미쳐가는 걸 보는 것과 죽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부모는 자식이 어떤 선택을 하길 바랄까? 그리고 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고모의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할머니는 고모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았다. 부모 앞서 죽은 자식의 초상을 내가 뭐 하러 치르느냐는 이유로. 어쩌면 할머니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고모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고통스럽게 사는 건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걸 할머니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는 ‘미쳐 돌다가 약 먹고 뒤진 년’일 지 모르지만, 할머니에게 고모는 그저 어미 잘못 만나 아프다고 말한 번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죽어간 누구보다 예쁘고 고왔던 딸이었다.


셋째 고모의 아들, 그러니까 큰아버지가 데리고 왔던 두 명의 오빠는 큰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떠났다. 어른이 되어서 들은 이야기지만 그 오빠들도 나처럼 큰집, 작은집, 고모네를 전전하다 결국 고아원에 보내졌다고 했다. 고모부란 사람은 고모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폭력과 술로 지내다 사고로 죽었고 오빠들을 돌봐줄 만한 친인척이 변변치 않았던 까닭에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다 결국은 성인이 될 때까지 고아원에서 지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 사람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나인데 할머니 덕분에 나는 가족이 생겼지만, 그들은 나처럼 할머니가 있었다면 그런 곳에는 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할머니가 똑같은 손자임에도 나는 거두고 그 사람들은 거두지 못한 사정과 그 마음을 생각하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면 팔자는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보다 어디까지나 남의 손의 달렸다는 말이 훨씬 맞는 말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업둥이의 슬픔과 기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