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둥이의 슬픔과 기쁨 2

할머니는 밭일을 나갈 때도, 마실 갈 때도 항상 나를 옆에 끼고 다녔다. 할머니 옆에 내가 붙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고,


“쟤가 그 업둥이고만.”


이라고 말했고, 할머니도 나도 그 말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고 넘겼다. 비밀이 없는 시골인 탓에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동네 사람들이 한 번씩 들러 함께 걱정해주는 게 마을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무슨 이유로 큰집에 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쟤가 그 업둥이’라는 말에는 흉보다 어린 애가 겪었을 마음고생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컸다. 물론 할머니와 내 뒤에서는 바람난 아빠 욕을 할 수도 있고 자식을 버린 엄마 욕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동네 할머니들은,


“아이고 잘 왔네, 잘 왔어.”


하며 내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오갈 때마다 손주모냥 챙겨주는 동네 할머니들의 살뜰함은 나라는 존재가 그전처럼 쓸모없이 울기나 하는 존재가 아니란 걸 보여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기를 쓰고 할머니를 따라 나가서 동네 할머니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걸 좋아했다. 때로는 집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혼자 다녀와도 될 걸 기어이 나를 끼고 다니는 할머니를 보면서 큰어머니는 영 못마땅했고 다 큰애를 뭐 하러 그렇게 데리고 다니냐고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럼 나는 그 말이 너무나 서운해서 고개를 숙인 채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할머니 따라갈 건데….”


하며 말하고는 냉큼 문을 열고 할머니보다 앞서 나갔다. 할머니가 고무신을 신고 나오면 나는 다시 할머니의 치마 뒤폭을 잡고 쭐레쭐레 대문을 따라나섰다.



시골의 봄은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하지만 할머니와 나에게도 가장 바쁘고 또 신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할 거리도, 구경거리도 많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나는 아침에는 나물을 캐러 갔고, 낮에는 봄꽃 구경을 하러 갔다. 냉이와 쑥은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봄나물이라 좋았고 나물 맛을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심심하기만 했던 때에 할 일이 생겨서 좋았다. 나는 할머니의 눈이 되고 할머니는 내 손이 되어 정신없이 냉이를 캐고 나면 바구니가 금세 그득하게 되는데 그럼 그날 저녁 반찬은 온통 냉이였다. 내가 캤다고 해서 누가 알아줄 것도,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식구들이 맛이 있다고 하면 마치 내 덕분인 것 같아 뿌듯했고 기분이 우쭐해져서는 마치 큰일을 해낸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점심나절이 지나고 나른할 때쯤이 되면 할머니와 나는 뒷산으로 봄꽃 구경을 하러 갔다. 할머니는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하얀 손수건을 들고나와 함께 뒷산을 천천히 올라갔다. 할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큰아버지가 만들어준 지팡이를 항상 짚고 다녔는데 손재주가 좋은 큰아버지는 땔감을 하려고 산에 가실 때마다 쭉 뻗어 괜찮은 나무가 있으면 따로 빼놨다가 할머니의 지팡이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지팡이가 제 명이 다할 때쯤엔 큰아버지는 새 지팡이를 만들었고 헌 지팡이는 불쏘시개가 되곤 했다.

집 뒷산은 별로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흔을 앞둔 할머니는 산에 오르면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숨 차 했다. 그러면 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내가 업어줄까?”


하고 물어보곤 했는데 그럼 할머니는 지금보다 더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그때 업어달라고 말했다. 그 말은 듣고 나는 할머니가 나를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묵직해졌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할머니가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해 급하게 병원에 실려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큰오빠한테 업혀 가는 할머니를 보면서 혹시라도 할머니가 죽을까 봐 울면서 언니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다행히 새벽에 돌아온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일 그랬듯이 할머니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누울 자리를 만들고는 얼른 누워 자자고 나를 불렀다. 그 이후로 한동안 나는 할머니가 늘 걱정되었고, 혹시나 큰오빠도 큰아버지가 없을 때 누가 할머니를 업어주나 걱정하며 밤이 오는 게 무서웠었다.


나는 산에 올라가며 지팡이로 할 한 나뭇가지가 없는지 찾아다녔다. 뭐든 할머니와 똑같아지고 싶었던 지라 꼭 지팡이가 있어야 했다. 여기저기 헤치며 마음에 드는 나뭇가지를 발견해서 주워들면 할머니는 혹시나 가시랭이라도 있는지 손으로 쓱 문질러 보며 거슬리는 것을 모두 떼어줬다. 비로소 할머니와 완전히 똑같이 갖춰지면 나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아프지도 않은 허리를 숙이고 할머니와 똑같은 모습으로 꽃구경을 했다.

늦은 오후쯤이 되면 할머니와 나는 으레 그랬듯이 집이 아닌 마을 회관으로 갔는데 신발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길이가 다른 지팡이 두 개를 보고 막순네 할머니는 이 작은 지팡이는 누구 거냐고 물어봤고 나는 내 것이라고 말했다. 막순네 할머니는 ‘젊은 할매’가 어디서 그런 야무진 지팡이는 구했느냐며 웃었고 동네 할머니들은 나를 젊은 할매라고 한동안 놀려댔다.

그런데 그 야무진 지팡이가 다음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한테 지팡이가 없어졌다고 징징거렸다. 할머니는 밖에 나가 두리번거리시더니 큰아버지에게 디딤돌 위 올려놓은 나뭇가지를 못 봤냐 물었고, 큰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불쏘시개로 썼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서러움에 눈물이 나왔다. 방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우는 나를 보며 등을 몇 번 쓸어주고는 일어나 벽장에서 ‘사랑방 캔디’ 한 통을 꺼내서 내 손에 쥐여주었다. 벽장에는 할머니가 자주 태웠던 청자 담배, 그리고 할머니를 보러온 손님들이 주고 과자나 작은 선물들이 쟁여 있었는데 나는 키가 닿지 않아 벽장을 열 수 없어 볼 수도 꺼낼 수도 없었지만, 오빠나 언니는 가끔 그 벽장에서 할머니 물건을 몰래 꺼내 가곤 했었다. 할머니는 지팡이는 다시 만들면 된다고, 막내 오빠한테 더 좋은 거로 만들어달라고 하면 된다고 나를 달래며 사탕을 꺼내 입에 넣어줬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지나고 작은오빠는 몇 배는 멋진 지팡이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 보답으로 나는 막내 오빠가 할머니 몰래 청자 담배를 꺼내 간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마을 회관에 들러 동네 할머니들과 노는 건 할머니의 일과 중 하나였다. 마을 회관은 동네 할머니들의 놀이터였는데 취직을 위해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거나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혼자 된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명절이나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아이를 볼 일이 없었는데 그 덕분에 나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마을 회관에 가면 할머니들은 늘 화투를 치고 있었는데 내가 할머니와 들어가면 하던 것을 멈추고 손을 내밀며 어서 들어오라고 반겨주었다. 서로 자기 옆에 와 앉으라고 서로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어디든 앉기 무섭게 옆에 앉은 할머니는 ‘오늘은 뭐 했느냐’, ‘어디 갔다 왔냐’, ‘오늘도 할머니랑 둘이 놀았냐’는 등 매번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면 나는 또 조잘거리며 똑같은 대답을 빼먹지 않고 읊어댔다. 그러면 또 할머니들은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아이고!’, ‘똑똑허네!’, ‘서울대 가야겠네.’ 하며 호들갑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서도 없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이야기지만 할머니들은 나의 모든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동네 할머니들 사이에서 나는 조용할 틈이 없는 시골 강아지였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쓰다듬어 주면 그저 좋다고 엎드리는 시골 강아지. 동네 할머니들은 진심으로 내가 잘 자라길 바랐다. 비록 엄마와 아빠에게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업둥이인지는 몰라도 동네 할머니들에게 나는 태어났으면 누가 되었든 보살피고 보듬어주어야 할 업둥이였다. 부뜰이 할머니는 사랑방에 놀러 오실 때마다 내가 먹을 것까지 넉넉하게 챙겨 왔고, 막순네 할머니는 늘 보이던 내가 안 보이면 혹시나 다시 어디로 갔는지 노파심에 사랑방에 들렀다. 과수원을 하시는 건넛집 할머니는 비바람에 떨어진 사과 중에 멀쩡한 것을 골라 가져다줬고, 회관에서 술을 팔았던 아줌마는 안주가 남으면 이거 깨끗한 거니 가져가서 할머니랑 먹으라고 싸주기도 했다. 아주 가끔 할머니 심부름으로 회관에 가면 “애기가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서 왔냐.” 하시며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가 요구르트를 쥐여줬고, 나보다 서너 살 많은 손녀가 있었던 윗마을 할머니는 손녀가 입던 옷을 챙겨 놓았다가 할머니에게 갖다주기도 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풍족했고 늘 배불렀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증명이나 하듯 나는 동네 모든 할머니의 관심과 걱정과 노파심 안에서 울지 않고 잘 자랐다. 누구든 살아온 날들이 살 날보다 많은 할머니가 되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다 똑같아진다는 것을 요즘 따라 온몸으로 느낀다. 생명을 가진 것은 그 자체로 모두 귀하고 소중하다 여기는 마음, 저 작은 생명이 모진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내심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 그럼에도 부디 건강하게 그리고 자기 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주길 바라는 간절히 비는 마음. 그 마음 덕분에 내가 이만큼 그리고 온전하게 큰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가 나쁘면 또 하루가 좋은, 보통의 업둥이 유년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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