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둥이의 슬픔과 기쁨1

할머니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나는 고아가 될 처지에서 졸지에 대가족의 식구가 되었다. 엄마와 아빠 대신 할머니와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엄마가 데리고 간 언니 대신 더 많은 오빠와 언니가 생긴 것이다.

물론 아빠와 새엄마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을 때도, 할머니가 사는 큰집으로 들어갔을 때도 나를 환영하거나 따뜻하게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없었다. 만약 저마다 가지고 태어난 복이 있다면 나는 이것이 내 복이라고 생각한다.

업둥이는 그 존재만으로 늘 거슬리고 신경이 쓰이는 이물(異物) 같은 존재다. 업둥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이 이물감을 억지로 견디고 외면해보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불쾌함, 분노, 미움과 같은 감정들은 고스란히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켜켜이 쌓이게 된다. 그리고 쌓인 감정들은 얽히고설키며 더는 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터지게 되는데 남이 함께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처럼 함께 지내면서 형성되는 불쾌함은 대개 참고 참다가 결국 터져야 해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로가 원해서 하는 동거조차도 갈등이 생기는데 하물며 원치 않는 업둥이와 살아야 하는 생활이라면 그 시간이 서로에게 있어 얼마나 괴로울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업둥이였던 나를 돌봐준 사람들은 ‘차마 버릴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연민 반, ‘거두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쩌겠냐’는 체념 반으로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다만 몇 개월이라도 나를 키워주었던 새엄마조차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받는 것보다 미움받지 않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걸 몸으로 느껴온 나로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화가 나거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는다. 미워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미워하는 마음을 감추는 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복을 타고난 덕분에, 나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쨌든 남의 자식을 데려다 기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큰집으로 들어가고 나서 큰집 식구들은 모두 조금씩 예민해졌고 가끔은 주고받는 말에 날이 서 있기도 했다.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부딪쳤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부딪쳤다. 무엇보다 할머니와 큰어머니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가난한 살림에는 입이 하나 늘면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된다는 단순한 셈법이 통하지 않기에 살림살이를 맡은 큰어머니 입장에서는 더 쪼개고 졸라매야 했으니 당연히 더 예민해지고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람난 시동생의 자식을 데려와 키우게 됐다는 소문이 돌자 걱정이랍시고 떠들어대는 동네 사람들의 뒷말은 고스란히 큰어머니와 사촌 언니의 부끄러움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소소하게 말다툼을 할 때마다 언니는 단 한 번도 할머니 편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사촌 언니가 얄미웠다. 두 명이 한 명을 공격하는 건 어린 내 딴에도 비겁한 일이었고, 나는 어떻게 해서든 할머니 곁에 있으면서 힘을 실어주고 싶었지만, 큰어머니도 언니도 나를 ‘업둥이’ 그 이상으로는 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는 편도 없이 항상 혼자 ‘대적’ 해야 했다.



할머니의 집은 아빠가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오래된 집이었다. 아빠가 서울로 떠나기 전만 만 해도 초가지붕이었었는데, 아빠가 엄마와 결혼할 때쯤엔 농촌개량사업이 시작되면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나는 그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잊지 못할 유년을 보냈다. 여름 장마 때는 슬레이트 지붕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혓바닥으로 받아먹으며 놀았고, 추운 겨울에는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 먹으면 놀았다. 내가 큰집을 떠나고 나서 몇 년 뒤에 갔을 땐 슬레이트 지붕은 다시 개량식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도 보수와 개량을 반복하고 집 구조도 신식으로 바뀌어 지금의 큰집은 내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예전의 집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지긴 했지만, 집터는 늘 그대로여서 그런지 그 집과 동네는 언제 가더라도 유년 시절을 떠오르게 만드는 시원(始原)의 공간이다.

할머니와 내가 지내던 방은 대문 바로 옆에 딸린 사랑방이었다. 원래는 할머니가 안방을 쓰셨는데 내가 이 집으로 오면서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는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썼던 사랑방과 바꾸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수시로 드나들기 쉽게 대문에서 가까운 사랑방을 쓰겠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안방에 지내면 아무래도 식구들에 눈에 띄게 되고 행여나 큰집 식구들의 눈치라도 받을까 걱정한 할머니의 노파심이기도 했다. 사랑방은 안방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지라 모두가 잠드는 밤이 되면 마치 우리 할머니와 나 둘만 사는 집처럼 조용하고 고요했다.

사랑방 옆에는 외양간이 있었는데 큰아버지에게 소는 자식 다음으로 가장 큰 재산이었고 나에게는 강아지 다음으로 제일 친한 친구였다. 어린 시절에 돈이 없어 제때 수술을 하지 못한 탓에 감지도, 뜨지도 못해 늘 소처럼 큰 눈망울을 한 큰아버지는 오빠들과 언니만큼이나 소를 애지중지하며 기르셨다. 첫 자식 대하듯이 아침저녁으로 외양간 들여다보는 걸 잊지 않으셨고 틈만 나면 진자리가 없는지 수시로 살펴보셨다.

큰아버지는 논으로 나가기 전에 항상 외양간 옆에서 한 손으로는 담배를 태우시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를 쓰다듬곤 했는데 그럼 나는 은근슬쩍 옆에 가서는 큰아버지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큰아버지가 소 등을 긁어주면 나도 옆에서 같이 긁어주고 파리를 쫓으면 나도 옆에서 파리를 쫓았다. 나는 뭐라도 하고 싶었고 수고를 덜어드리고 싶었지만, 큰아버지 역시 나를 측은지심으로 데려온 ‘업둥이’ 이상으로는 쳐주지 않아 나는 소 주변만 애꿎게 맴돌곤 했다.

하지만 할머니 옆에 있으면 어엿한 ‘일꾼’이었다. 새벽에 큰아버지가 소를 데리고 논에 갔다가 저녁쯤 돼서 돌아오시면 큰어머니는 슬슬 저녁 식사 준비를 하셨고, 할머니는 사랑방 옆 아궁이 위에 가마솥을 올리고 물과 여물을 가득 넣고서는 소죽 끓일 준비를 하셨다. 그러면 나는 할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붙일 때를 기다렸다가 옆에서 풍로를 돌렸다. 장작들을 가지런히 놓고 풍로를 돌리면 금세 불이 타오른다. 그러면 할머니는 힘도 세서 풍로로 잘 돌린다고 칭찬을 했다. 그러면 나는 비로소 ‘괜찮은 일꾼’ 취급에 기분이 좋아져 우쭐대곤 했다. 그 우쭐함이 때때로 지나쳐서 아궁이에 장작을 마구 집어넣다가 큰아버지가 고생해서 패 놓은 것도 모르고 계집애가 불장난이나 한다고 오빠들한테 혼난 적도 많았다. 그럼 또 할머니는 외롭게 혼자 나서서 오빠들을 ‘대적’하곤 했다.

내가 시골을 떠나고 몇 년 후 다시 왔을 때는 외양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창고가 생겼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큰아버지는 키우던 소를 파신 것이다. 힘도 들고 체력이 싹 다 정리했다고 말했지만 아마도 넉넉지 못한 살림과 오빠들과 언니의 학비에 보태기 위해 소를 파셨으리라.


내가 떠난 이후 그 집은 부뚜막이 없어지고, 외양간이 없어지고, 아궁이가 차례대로 없어졌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서울 사는 손자들이 언제나 오나 기다리며 할머니가 노상 나와 앉아 있던 대청마루가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모든 것들이 다 아쉽고 그리운 것들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아쉬운 건 역시나 외양간 아궁이와 대청마루다. 나와 할머니가 가장 오래 앉아 있었고 서로를 기다렸던 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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