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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이 생존을 위협할 때

저장장애와 불안

인간이 저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저장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능적 행위다. 둘째,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여기서 상실이란 자신의 에너지(정신분석학에서는 리비도라고도 부른다)를 쏟아부었던 대상(물건, 사람, 이상향 등)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상실하게 되면 마음껏 슬퍼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맞닥뜨린 상황을 받아들이고 대상에 투여했던 리비도를 거두어들인다. 이 과정을 ‘애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리비도를 투여할 새로운 대상을 찾게 되면서 과거 상실했던 대상은 자연스럽게 잊는다. 그런데 상실의 충격이 너무나 커서 이러한 애도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상실한 그 당시 상황과 상태에서 고착되거나 상실 이전 상태로 퇴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 과정이 반복되거나 정도가 심해지면 우울증이나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심각하게는 정신증을 앓기도 하는데, 이른바 ‘저장강박증’이라 부르는 저장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호더는 안다, 자신이 왜 저장하는지

수집과 저장 행위를 두고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가르는 기준은 그 저장 대상이 ‘조직화 혹은 유목화(categorization)’[1]되어 있는가에 대한 여부다. 규칙과 질서에 따라 그 수집과 저장 대상이 분류되어 있다면, 그리고 찾는 데 어려움이 없다면 정상적인 저장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규칙이나 기준 없이 쌓여 있기만 하고 원하는 것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병리적 저장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살(아내)기 위해 맹목적으로 저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호더(hoarder)’라 불리는 사람들인데 강박적 축적을 겪고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들은 낡고 필요 없는 물건이나 쓰레기를 집 안에 쌓아 두는 행동을 반복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가득 차 있는 물건을 통해 위안을 느끼기 때문에 가져온 물건을 버리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2].

호더가 모으는 것은 매우 다양하다. 가전제품, 생활용품, 음식, 옷, 동물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쓸 만한 물건을 모으는 수준부터 특정 물건에 집착하여 돈을 주고 사며 수백 개씩 저장하는 수준까지 그 집착의 정도 역시 천차만별이다. 그들이 저장하는 이유는 나름 타당하다. ‘나중에 필요할지 몰라서’, ‘돈이 되는 물건이기 때문에’, ‘소중한 추억이라서’와 같은 이유다. 그러나 그들이 저장하는 물건들은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한 최소한의 목록화조차 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교환가치가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저장 대상은 대개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 형편없는 것이고 필요해도 본인조차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는 엉망의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호더에 대한 이슈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공론화된 것은 불과 십몇 년이 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가 실시하는 ‘정신질환 실태 역학 조사’에는 저장장애 항목이 없고 또 저장장애 판단 기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저장 장애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분류되기 이전에는 지나친 수집벽 또는 비정상적인 행동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 정도로만 취급되었던 것이 공공의 위생을 위협하는 문제로 대두, 전환되면서 사회 이슈로 공론화되었다. 한 예로 한국의 호더에 대해 집중 조명한 SBS스페셜 <죽어도 못 버리는 사람들>(2013년 4월 21일 방송)은 저장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건강은 물론 생존을 위협할 만큼 심각한 저장 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동시에 주변의 위생과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았거나 그로 인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이후로 저장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가족들이 떠난 이후 맹목적인 수집에 집착한다거나,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죽음에 대한 불안을 건강식품을 저장하는 행위로 대체한다거나,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을 동물에게 위안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동물을 수집하는 행위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절망, 소중한 것을 상실한 이후 느끼는 우울함 그리고 거기서 오는 불안에 대해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실과 그로 인한 불행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은 자신만의 방어기제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저장이라는 행위였다. 그들에게 있어 저장은 과거 불행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최후 방어 수단이라는 점에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방어기제가 고착과 퇴행을 반복하며 강박을 만들어내고 과거로부터 한발 치도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호더들은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저장하는지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저장 대상을 결정하기 위해서 교환 가치가 있는 것, 잠재적 가치를 지닌 것 등과 같은 기준을 바탕으로 분류, 선별 작업을 거친다. 그러나 호더들은 물건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더들의 저장 행위는 맹목적인 집착에만 멈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 판단 하는 능력이나 결정하는 능력이 결여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강박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강박감이 동반하는 특징(심리적 욕구)으로 불확실성과 의심을 꼽았다. 실제로 저장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저장한 대상에 대해서 선별적 가치를 부여하는 판단력이나 구별 능력, 결단력을 부재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들은 되도록 최대한 모든 결정을 뒤로 미루기 위해 애쓴다. 선택과 결정을 한다는 것은 곧 선택하지 않은 것을 상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정을 계속 미루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처럼 선택하지 않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아도 될 때는 오로지 죽었을 때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저장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선택은 곧 죽음과 같은 의미이기에 선택은 그만큼 어렵고 괴로운 것이고, 이 괴로움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맹목적인 수집과 저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장) 강박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가 불확실성과 의심이라는 주장을 따르자면 저장하고 수집하는 대상들에 대해 가치를 분별하거나 판단하지 못하는 행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믿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결정권도, 결정한 능력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결정권이란 오로지 죽음뿐이라면 어느 누가 쉽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을까. 죽음에 의해서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공포는 자신의 삶에서 갈등이 생기고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가장 먼저 죽음을 살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결국 결정이란 행위는 곧 죽음과 같은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 ‘생존과 죽음은 다른 의미의 말이 아니며 그만큼 결정을 하는 것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굉장한 큰 두려움을 가질’[3]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어떤 것이든 가장 불확실한 것과 믿을 수 없는 것 중 최상급이 바로 삶이라면, 그리고 이 삶을 지속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저장이라면, 이 저장 행위는 죽음을 최대한 미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더 강박적으로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한 상실한다

저장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지나치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다가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면 그 이후부터는 아예 정리를 포기하거나 당면한 상황을 외면한 채로 수집과 저장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는 불안과 강박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스스로 해결하기엔 벌어진 상황이 그 수준을 이미 넘어섰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에는 저장 행위에 대해서 지나친 수집벽 또는 정신병과 같은 개인의 비정상적인 행동쯤으로 취급되었고 어디까지나 개인의 습성으로 이해된 까닭에 사적인 문제로만 이해되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의 비정상적인 수집과 저장 행위들이 공공의 영역을 침해하고 또 공유하는 구성원들의 건강과 위생을 위협하는 문제로 전환되면서, 그리고 개인의 재산권만큼이나 공공의 환경권‧건강권이 중요해지면서 지자체의 적극적인 개입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물론 공론화되기 이전부터 여러 시민 단체들의 자원봉사를 통해 자체 해결을 도모했긴 했지만, 여기에 지자체의 공권력이 보태지면서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해결방안이 마련되고 있으며 실제로 여러 시민 단체와 지자체들은 호더의 문제점과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관련 규제와 해결 방안 등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외부적인 해결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역시나 근본적인 문제인 저장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저장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울장애나 불안장애가 동반된다는 조사 결과를 미루어본다면 외부 환경을 정리해줌으로써 당사자는 물론 주변 이웃들에게 쾌적한 조건을 조성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사자의 저장 장애를 앓게 만든 원인을 찾고 또 그것을 공공 의료 시스템을 통해 치료를 받도록 보조해주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저장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 접근할 때 가장 민감해야 하는 부분은 “어떠한 방법으로 개입하느냐”다. 깨끗하게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접근하는 한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과 동시에 정서적 혼란만 가중할 수 있다는 지적’[4]은 타당하다.

저장장애는 우울과 불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증상이자 결과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집착이 저장 강박이란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울증은 과거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은 미래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는 <한낮의 우울>[5]의 작가 앤드류 솔로몬의 말을 상기했을 때, 저장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또 그들에게 필요한 건 상실을 치유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 그리고 상실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스스로 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자신이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대상을 상실했다는 죄책감을 버리고 퇴행과 강박으로부터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상실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땅에 존재하는 이상 어떤 것이든 언젠가는 돌아가고, 사라지고, 죽게 마련이다. 죽음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즉 상실은 인간의 생에서 피할 수 없다.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죽음은 정해진 져 있듯이, 그리고 주어진 생명의 길이는 각자 다르기에 한 존재가 다른 생명과 함께 하는 동안 상실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상실을 받아들이고 애도하고 슬픔의 과정을 거쳐 잊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다. 자신의 리비도를 쏟는 과정은 곧 인생을 사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저장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버리는 것이다. 제대로 버리지 못하면, 그리고 잘 버리지 못하면 저장은 생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맹목적인 행위가 되어 과거와 미래는 물론 현재까지 압도하며 존재를 생으로부터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태어나고, 잃고, 죽고, 다시 채우는 순환의 연속이야말로 진짜 삶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유성진, <저장장애>, 학지사, 2017년.

[2] 네이버 백과사전

[3] 프로이트, <늑대인간>, 열린책, 2013년.

[4] <경향신문> 2019년 5워 19일자.

[5] 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민음사, 2004년.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10월 5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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