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선한 방어 기제를 꼽으라고 한다면 ‘웃기기’, ‘농담하기’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맞는 지인들과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시답잖은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또 그러면서 나 역시 즐거워하기. 그러고나면 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들이 소리없이 사라지면서 또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충전되곤 한다. 모임에 가면 농담도, 개그도, 우스갯소리도 잘하고 또 좋아하는 큰 이유다.
그러나 남들을 울리기는 쉬워도 웃기는 건 참 어렵다. 무엇보다 상대방과 나의 개그 코드가 맞아야 하고, 재미있되 저속하지 않아야 하고 그 표현은 세련되어야 한다. 비극보다 희극이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나는 희극인을 좋아하고 또 존경한다.
남들이 그 재미없는 개콘을 뭐 하러 보냐고 할 때도 나는 언제나 본방을 사수하는 열혈 시청자였다. 솔직히 재미없을 때도 많았다. 개그 포인트도 없고, 마냥 상대방을 까는 것으로 코너를 채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방송까지 사수토록 만들었던 건 개그가 내 불안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어기제였기 때문이다. 개콘을 보는 시간만큼은 나는 무념무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었고, 저들의 재치에 배를 잡기도 했다.
물론 다른 코미디 프로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내가 개그콘서트를 좋아했던 이유는 적어도 웃기는 개그맨이 아닌 희극인들이 만드는 (막판에는 이마저도 사라졌지만) 프로였기 때문이었다. 개그콘서트에 나왔던 사람들 중 오래오래 남은 사람을 곱씹어보면 개그맨보다는 희극인이었다고 생각한다.(물론 못 미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개그콘서트가 발굴한 희극인 중 가장 빛났던 여배우를 꼽으라면 나는 김민경, 장도연, 그리고 박지선을 꼽고 싶다.
박지선은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뜬 희극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재치 있는 입담은 그녀의 외모를 일찌감치 재꼈다. 그녀는 어떤 대화를 하든 기승전“유머”로 가볍게 마무리 지으며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무엇부다 그녀의 유머엔 어느 하나 텅 비어 의미 없는 것이나 진심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녀는 부족한 사람, 아픈 사람, 소외당하는 사람의 말에 경청했고, 그들의 말과 이야기에 자신의 가치관을 덧붙이며 웃음과 농담으로 그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것까지도 잊지 않았다.
개그콘서트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대개 못생긴 여자, 오지랖 넓은 엄마, 드센 이웃집 아줌마였다. 그녀가 짧은 파마머리 가발을 쓰고 나오면 어떤 캐릭터인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하지만 한 번도 뻔하거나 식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의 생각과 마음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 역할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할머니 역할이 아니라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연기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연기는 늘 섬세하고 정확했다.
게다가 그녀는 사람을 분석하는데 뛰어난 관찰력과 그것을 웃음으로 표현할 줄 아는 굉장한 능력을 가졌다. 모든 인생은 불안하고 그래서 화가 나지만 조금만 멀리 서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님을 진즉 알았던 그녀는 그녀만의 특별한 웃음 코드를 이용해 승화시켰다. 몇 년 전 그녀가 방송을 통해 소개했던 그녀의 할머니 일기장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할머니의 일기장 마지막엔 늘 가족을 향한 할머니의 불평과 불만이 담긴 욕이 쓰여 있었는데 머리끝까지 뻗은 할머니의 분노는 할머니를 향한 박지선의 애정이 어린 마음이 투영되면서 귀여운 투정으로 바뀌었다. 혹 타인의 진심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늘 그 대상에 대해서 애정을 담았기에 그녀의 우스갯소리는 가볍지도 불쾌하지도, 게다가 촌스럽지도 않았다.
박지선은 농담과 해학이 뭔지 아는 희극인이었다. 그녀의 사용하는 언어는 늘 즐거웠고 또 유쾌했다. 그녀는 사는 게 즐거워서, 행복해서 농담을 하고 남들을 웃기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하게 지내는 게 안타까워서, 존재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가치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웃음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을 기꺼워한 희극인이었고, 실제로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단 것을 증명하는 진짜 희극인이었다. 거기에 타고난 그녀의 선한 마음과 인간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녀는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큰 즐거움이 없더라도 소소한 즐거움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는 걸 그녀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연예인의 죽음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지만 박지선의 죽음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한 척, 견디는 척, 아무렇지 않다고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숨겨진 슬픔이 가슴에 와 닿아서. 누구보다 엄마와 사이가 좋았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란히 엄마와 같은 길은 간 그녀가 참 안타깝다가도 한편으로는 참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하는 희극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박지선을 말할 것이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똑똑했고 겸손했고 또 하는 말마다 빵빵 터뜨렸던 유쾌했던 희극인었다고 말할 것이다.
부디 좋은 곳에 가시길, 나만의 진짜 희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