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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내가 버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1. 나의 먹거리가 풍부해진 이유


 과거에 비하면 먹거리 빈부 격차는 다른 것들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뷔페만 가더라도 예전에는 쉽게 접하지 못할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넘쳐난다. 1인당 정해진 값만 지불하면 음식의 종류에 상관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힘차게 강을 거슬러 올랐던 연어부터 남해 바다를 신나게 헤엄쳐 다녔던 돔까지, 테이블은 순식간에 국적과 출신을 불문한 음식들로 가득 채워진다. 잘은 몰라도 넓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들이라 그런가 왠지 더 쫄깃하고 맛있게 느껴진다.

배가 터지도록 먹을 기세로 한가득 접시를 채웠지만 먹다 보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음식을 남길 때도 많다. 과식은 미덕이지만, 꾸역꾸역 남은 음식을 먹는 건 미련한 짓이라 생각하기에. 잘 먹었으면 됐지, 라는 생각으로 음식을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난다.( 한 때는 비싸서 못 먹었던 것들이지만 지금은 배불러서 못 먹는 것들이 되었다니. 음식을 남길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


나의 먹거리가 풍요로워지려면 우선 그 양이 많아야 하고, 그다음으로는 가격이 저렴해야 한다. 그런데 자연은 이 조건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 우선 식물이든 동물이든 잡거나 먹을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고, 보관도 굉장히 어렵다. (보관은 식재료의 가격을 책정하는데 중요한 요소인데 보관이 어려운 건 판매자 입장에서 부담해야 할 것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보기 위해서는 식재료의 값을 비싸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크기나 모양도, 맛도 제각각이라 자연에서 자란 것들은 상품성이 없는 것이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바로 양식업이다. 양식업이 보편화되면서 우리의 식탁은 이전보다 훨씬 풍요로워졌고, 다양해졌다. 적어도 식재료를 선택하는 데 있어 문턱이 낮아진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양식업은 많이 발달했다. 노르웨이의 경우 연어를 잡는데 필요한 시간, 비용, 그리고 위험을 줄이는 방법으로 연어 양식업에 눈을 돌렸다. 가두어 놓고 기르니 목숨 걸고 바다를 나갈 일도, 빈손으로 돌아올 걱정도 없어졌다. 할 일이라곤 질 좋고 맛 좋은 상품을 위해 풍부한 먹이와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 정도다. 아, 되도록 빨리, 또 크게 만들어서 좋은 상품으로 팔기 위해서 사료를 아끼지 않는 것도 잊지 않는다. 참고로 1마리의 연어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먹이 양은 연어의 3배가 된다고 한다. 나의 먹거리가 풍족하게 먹기 위해서는 연어가 그만큼 더 많은 먹이를 먹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바다의 절반이 양식장이 되어도 모자랄 듯싶다.

사람도 배가 부르면 음식을 남기게 마련이다. 연어라고 다를까. 연어가 먹고 남긴 사료는 결국 바다에 버려지고 썩게 된다. 과거엔 생명체였지만 죽어서 사료가 된 것들은 바다로 흘러가 해양 오염의 또 다른 공범이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양식으로 길러진 생선들이 잘 먹어서 기름지고 먹을 것도 많다고, 자연산 애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생하느라 독해져서 질기고 맛이 없다고. 그러나 양식으로 길러진 수많은 생명체들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죽어가는지조차 모른다. 무엇이 더 자연스럽고, 더 지구적인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양식장에서 사는 동식물들은 천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일도, 먹잇감을 구하려고 목숨 걸고 바다를 헤엄쳐 다닐 필요도 없다. 다만 양식장이 좁아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갇혀 있는 탓에 먼 곳까지 자유롭게 가지 못하는 건 좀 아쉽다. 멀리 가지 못하니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 알지 못하고,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보는 것이라곤 자신과 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광어면 광어, 연어면 연어가 전부인 단일 세상이다. 사실 가장 끔찍한 건 이것 아닐까.


2. 누군가의 서식지를 파괴한다는 것


몇 년 전 내가 살았던 곳은 바다를 메워 만든 계획도시였다. 매립이 시작되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이곳은 바다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쭉쭉 뻗은 8차선  넓은 도로와, 미래형 주거 공간을 자랑하는 최첨단 도시로 탈바꿈했다. 이곳이 바다였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땅을 밟을 때마다 찍~하고 바닷물이 삐져나올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차를 타고 지나면 물고기의 비명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그러나 농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그로테스트하다. 바다에 들이부은 거대하고 막대한 흙과 시멘트, 그리고 폐기물의 두께를 생각한다면 우스갯소리로 넘길 말은 아닌 것도 같다. 바다가 흙과 시멘트로 덮일 때 그 속에 살았던 수많은 생명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도망갈 겨를도, 하다못해 깜작 놀랄 겨를도 없이 흙더미에 묻혔을 테다. 짧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말이다. 비단 바다에서 살았던 생명체뿐만 아니라 바다를 서식지로 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은 졸지에 갈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헤매다 다른 곳으로 떠난 것들도 있을 테고, 자기가 살았던 곳을 끝까지 찾겠다고 수없이 뱅뱅 돌다가 죽은 바보 같은 생명체도 있을 것이다.  


2~3년 전부터 신기한 사진이라며 지역 sns에 사진이 올라왔는데 그것은 바로 베란다 방충망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박쥐 사진이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무섭다,부터 해서 ‘신기하다’, ‘박쥐는 처음 본다’, ‘우리 집에도 왔었는데 그놈이 저놈인 것 같다’ 등등. 태어나서 박쥐를 볼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박쥐는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깊은 동굴에서나 살 법한데 이 첨단 도시에 나타날 이유가 없으니 하는 말일 테다. 그중에서 가장 공감을 많이 얻은 댓글은 박쥐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니 이 동네는 친환경도시임이 분명하다는 글이었다. 그 댓글이 달리자 다들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을 감사했고, 좀 더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다짐도 빼먹지 않았다.  

 

우리는 인공적인 곳에서 보기 어려운 것일수록 친환경, 친자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인간의 손길이나 발길이 닿지 않는 공간에 사는 동물이나 식물들은 친자연적이고 친환경적이라는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특히 개체수가 적거나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동식물일수록 자연 깊숙한 곳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나 추측은 충분히 가능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동물이나 생물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 출현한다고 했다고 해서 그 공간이 친환경적이거나 친자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바다였고, 모래였고, 또 숲이었던 이 공간은 인간이 인위적인 힘을 이용해 생태계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여기서 살았던 수많은 동식물들 중에 일부는 흙더미에 묻혔고 일부는 시멘트에 화석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생물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피했던 동물도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 자긴의 몸을 기형적으로 변형시킨 것들도 있었다. 아마 개 중엔 자신의 서식지가 이렇게 바뀐 줄도 모르고 떠났다가 돌아온 동물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아무리 찾아 헤매도, 뱅뱅 돌아도 예전의 공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매달릴 나무도, 먹이를 사냥할 숲도, 잠을 잘 곳도 없어졌으니 말이다. 매달린 곳이라곤 아파트 방충망이었던 지라 오랜만에 돌아온 박쥐가 어쩔 수 없이 아파트 방충망에 매달려 잠을 청했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이 공간을 친환경, 친자연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담을 말하자면 코로나바이러스 19 사태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바이러스 19를 퍼뜨린 숙주로 박쥐가 지목되었다. 보기도 어렵고 만지기는 더 어려운 박쥐인데 무슨 수로 이 박쥐와 인간이 접촉해서 코로나바이러스 19를 퍼뜨렸단 말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베란다 방충망에 매달려 있는 박쥐를 생각하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근거 없는 말도 아닌 것 같다.


3. 소비를 자랑하는 아이들 뒤엔


아껴 쓰라는 말은 꼰대의 잔소리가 된 지 오래고 와 닿지 않는 공허한 조언이 된 것도 오래다. 먹거리, 놀거리, 할 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소비를 미덕으로, 과잉을 풍요로 살아온 세대들에게 아껴 쓰라는 말은 굉장한 모순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은 곧 권리라는 생각의 보편화로 인해 아껴 쓰고, 나눠 쓰는 일련의 행위들은 때때로 가난해서 하는 행동 또는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행동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새로 산 옷은 자랑할 만 하지만, 물려 입거나 얻어 입은 옷은 왠지 민망하거나 창피하다.

많은 부모들은 우리 아이는 풍요롭게 살아야 하니까, 또는 남에게 주눅 들지 않아야 하니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도, 듣지도 않아야 하니까, 를 강조하며 끊임없이 과잉의 풍요로움을 제공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같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쓸 기회가 생각보다 없다. 어쩌면 아이들이 지구를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부모들이 그리고 어른들이 아예 그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누리는 풍요로움이 어디서 출발하고, 어떻게 유지됨으로써 얻어진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와 이 사회를 받치고 있는 이른바 ‘어른’은 그것이 왜 필요한 지를 아이들에게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백번을 반복해도 모자라다.


분명한 건 지구가 가진 재원은 정해져 있고 언젠가는 고갈된다는 점이고 내가 풍요로워질수록 지구는 가난해지고, 병들어간다는 것이다. 나도, 우리도, 지구도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상생이란 말은 지구와 인간 사이에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말인 것 같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비추어보면 자연이 인간에게 유익했던 적은 있어도 인간이 자연에 유익했던 경우는 거의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잘못된 행동 뒤에 오는 뼈저린 후회와 반성의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과 두 차례의 전쟁만 생각해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소비를 자랑하고 풍요로움을 권장하는 한 지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달라질 것이다. 더 빈곤해지고 더 잔인하게 말이다. 수많은 환경가와 과학자들이 하는 경고와 자연이 보내는 싸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보다 지구는 강하고, 세고, 자정작용이 뛰어나다는 나태한 태도는 지구를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구는 버틸 만큼 버텼고 참을 만큼 참았다.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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