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믿을 수 없는 화자"의 말과 이야기에 담긴 진실


정신적 질환을 말하는 또다른 방식     


신체적 질환은 물리적인 몸과 관련된 것으로 그 상태나 정도를 눈이나 수치로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며 진단이나 치료의 선택에 있어서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을 따르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검사 수치나 관련 데이터를 보다 신뢰하게 마련이고, 환자의 말과 언어는 환자의 컨디션을 파악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 사용하거나 데이터를 뒷받침하는 부수적 근거로 이용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와 달리 정신적 질환은 기분이나 감정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기 때문에 신체적 질환보다 진단이 복잡하고, 전적으로 환자의 말과 언어에 집중하고 의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치료 과정이나 방법의 선택도 쉽지 않다. 이때 발생하는 딜레마로 의사 관점에서 환자의 말과 언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자신의 기분과 상태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진술하는 환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며 환자가 자신과 의사 모두를 기만한다고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느끼는 우울함이 일시적 착각인지 아니면 진짜 우울인지 알 수 없고 우울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우울하다고 속인다고 하더라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1].

정신적 질환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자기의 증상을 객관화하여 설명한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설명한다고 해도 그 이야기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들의 말은 소위 ‘미친놈이 하는 말’이나 ‘정신 나간 소리’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언어를 빼앗긴 이들은 오로지 분석과 치료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 예로 정신적 질환을 다룬 글이나 책의 경우 그 서술 주체는 지식과 권위를 가진 의사나 관련 전문가이며 그 서술 목적 역시 원인 분석이나 치료법과 같은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혹 정신적 질환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서술의 주체가 될 경우라도 대개 그 내용은 극복기 또는 완치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혹시 모를 사회적 비난이나 낙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익명을 사용하는 등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눈에 띄는 변화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우울증, 조울증, 기분장애와 같은 정신적 질환을 가진 환자들 스스로가 서사의 주체가 되어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또 주목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분석과 치료의 대상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스토리텔링의 주체가 되어 자기 질병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또 스스로 기록하여 공유한다. 이 현상은 한편으로는 낯설고 한편으로는 흥미롭다. 이른바 ‘믿을 수 없는 화자’가 말하는 서사들이 대중들이 관심과 공감을 얻었다는 점에서 낯설고, 질병을 유행이나 소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공론의 장을 끌어내어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환자, 스토리텔러가 되다


우울증에 대한 원인, 증상, 치료, 그리고 정치적 시각 등 다양한 시선으로 우울증을 분석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은 조울증을 겪고 있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비롯하여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는 우울증 치료가 어려운 이유로 정신적 질환에 늘 들러붙어 있는 ‘사회적 오명’[2]이라는 딱지를 꼽는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우울증 또는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경우, 그 사람이 아무리 진실을 말한다고 한들 의심을 먼저 하게 되는 우리의 무의식적 태도를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가볍게 자신의 우울증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공공의 포즈가 되고 권력으로 확장하게 되면 정신적 질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질병에 대해서 외부로는 철저히 숨겨야 하는 수치이고 내부로는 싸워서 이겨야 하는 투쟁의 대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투쟁에서 지는 사람은 이른바 ‘정신이 나약한 사람, 가족이 부재한 사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과 같은 부도덕하거나 반사회적 개인이라는 이중의 오명을 쓰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치료에 임하는 환자의 자세에 대해서도 강조하는데 우울증의 경우 외부로부터 생성된 질환이나 질병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환자의 내면에서 만들어지고 축적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치료의 시작은 병원이나 약이 아닌 환자 스스로 자신을 살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 자신이 우울증인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잘 살피고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자신의 감정을 느껴 본 다음 그것들에 생각하는 것이다.(앤드류 솔로몬, 30)라고 말하며 환자들에게 자신의 마음과 감정에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환자 스스로 서사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질병을 말하고 또한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먼저 우울증이라는 말보다 기분부전장애(우울증 증상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장애)라는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책인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시리즈(흔, 2018)는 환자 자신이기도 한 작가가 의사와 나누었던 진료 상담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정리하며 자신의 병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등 질병과 환자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이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로 만화 형식을 취하며 우울증에 대해 비교적 유쾌하고 쉽게 접근한 서귤의 <판타스틱우울백서> (이후진프레스, 2019)와 전지현의 <정신과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팩토리나인, 2018)는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아가는 과정, 자신과 합이 맞는 의사들을 찾는 방법을 보여주며 치료 ‘받는’ 소극적인 환자가 아닌 자기 몸을 살피고 분석하며 자신에게 맞는 약과 전문가를 찾아가 치료 ‘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담고 있어 환자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질병과 치료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두 책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있어 능력이나 실력보다 둘의 상호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치료의 선택권은 의사가 아닌 환자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현직 기자가 쓴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한겨레출판, 2020)는 조울증을 앓고 있는 작가가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는 배제되어야 하는 비정상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며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임을 강조한 책이다. 더불어 질병은 과학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건 사회의 몫인 만큼 질병은 개인의 도덕적 방만이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정신적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직접 쓴 텍스트들이 지속해서 등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마음, 감정, 기분과 그것들이 만드는 정신적 질환을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편견이 과거보다 어느 정도 희석되고 있는 현상은 유의미하다. 인간은 모두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 그리고 불안은 개인의 능력과 실력에 따라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불안을 만드는 억압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무의식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을 인정하려는 개인과 사회의 태도 변화는 억압과 불안이 만들어내는 질병을 공론의 장으로 이동하여 함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적 질환에서 늘 빠지지 않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우울함은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 근원에는 바로 불안이 놓여 있다. 많은 정신 분석가는 불안은 우울증의 전조라고도 하며 실제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증상 역시 불안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불안은 위험을 예상하고 대비하는 긍정적 기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건강한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 개인은 불안을 적극적으로 제어하고 잘 억압해야 한다고 교육받아 왔다. 특히나 오랫동안 자본/효율/경쟁을 주요 담론으로 삼아왔던 시대에서 불안을 드러내는 건 곧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불안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과 저항감을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사회는 각자도생을 요구하고 개인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들여다보는 대신 이기거나 이길 수 없다면 보기 좋게 숨기거나 아예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는데 한동안 인기를 얻었던 자기계발서의 주제로 ‘기술’, ‘성장’ ‘역량’과 같은 담론이론이 강조되었던 분위기는 이러한 증후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조차도 먹히지 않는, 억압도 불안도 그 임계점을 넘은 지금 우리 사회의 상황에서 등장한 이 새로운 방식의 ‘질병을 말하기’는 그렇기 때문에 더 주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질병을 말하는 주체는 모든 질문의 시작을 문제적 개인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외부의 요구와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 부족과 결핍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인정하고자 한다. 성장을 위해 앞으로 가는 대신 우울한 과거를 돌아보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대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능력과 역량을 최대화하는 대신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감정은 감지하고 또 드러내야 한다


이제껏 정신병자의 헛소리였던 그들의 말은 헛소리가 아니라 내면에 억압되었던 불안의 말들임이 환기되면서 의미 없었다고 치부되었던 그들의 웅얼거림은 내면에 억압되었던 나의 언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과 조우하면서 정상/비정상의 범주로 나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을 넘어 자율적 개인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나, 그리고 우리의 공감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감정은 혼자서 소비할 때보다 함께 공유될 때 훨씬 풍부해지고 개인의 불안은 함께 말해짐으로써 모두가 평안해진다는 걸 상기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지금 느끼는 불안이 타고난 개인의 운명이나 불운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오는 과정에서 무엇을 상실한 지 알지 못한 채, 혹은 외면한 데서 오는 복합적인 감정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스스로 그리고 함께 말해져야만 한다.

인간은 모두 불안이란 거대한 파도 위에 억압이란 배를 띄우고 산다. 파도는 잔잔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것을 삼킬 듯이 거칠기도 하다. 배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파도에 뒤집히지 않을 정도로 배의 크기와 무게를 늘리던가 아니면 파도와 움직임에 따라 함께 흔들리든가. 그러나 그 아무리 무거운 배도 파도를 이겨보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은 전복된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파도가 없다면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속도를 낼 수도 없다. 유감스럽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흔들리는 배에만 집중하고 배가 뒤집히지 않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살펴봐야 하는 건 파도다. 파도를 만드는 이유는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듯 저마다 가지고 있는 불안의 이유는 모두 다르다. 불안이란 배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면 배를 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배를 흔들리게 만드는 파도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무엇 때문에 파도가 미친 듯이 요동치는지 스스로 감지하고 알아채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1]맹정현, <멜랑콜리의 검은 마술>, 책담, 2015년, 22쪽, 

[2]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민음사, 2003년, 534쪽.     

(이글은 르몽드 문화톡톡 9월호에도 게재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의 시선으로 유지하는 결혼 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