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 출구에 옆에 위치한 화장실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나는 ktx 첫차를 타고 7시에 용산역에 도착했다. 엄마는 엄한 서울까지 가서 아침부터 괜히 고생하지 말고 하루 전에 미리 가서 느긋하게 준비하라고 말했지만, 한없이 아쉬운 나의 모의고사 점수와 10. 4:1이라는 경쟁률은 왕복 차비에 비싼 숙소비까지 투자할 만큼 매력적이지 못했다.
개찰구에서 나오는데 배가 싸했다. 배가 고파서 기차 출발 전에 마셨던 자판기 커피 믹스가 대장을 할퀴는 모양이다. 유전으로 물려받은 규칙적인 변비와 설사는 유일한 고질병이었는데 삼한사온처럼 변비와 설사가 반복되는 게 대표적 증상이었다. 어제가 변비 3일 차였으니.... 오늘이 설사 1일 차인가.
7시 10분, 이제 막 출근하는 사람들로 역사가 붐비기 시작할 텐데 몇 번 출구 화장실로 가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한번 앉으면 30분은 앉아 있어야 하는 지겨운 배변 습관은 화장실 위치 선택에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나는 엉덩이 끝에 최대한 힘을 주며 최대 한 인적이 드문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개찰구에서 가장 먼 5번 출구 화장실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들어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지켜보다 이때다 싶어 화장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세 개의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나는 편안한 일처리를 위해 가장 끝 칸 앞에서 서서 문을 밀어 보았지만 엇, 밀리지 않았다. 뭐야, 하는데 청소 도구함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항문에 다시 한번 힘을 주었다.
어쩔 수 없다. 재빨리 옆 칸 문을 열고 변기에 주저앉자마자 분열되어 있던 내 안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았다. 여기에 중력의 힘이 더해지려는 찰나였다.
“여사님, 라면 몇 개 넣을까요? 세 개면 되려나?”
경쾌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헙! 대장 활동 일시 중지.
"사람이 셋인데 어떻게 세 개를 끓여. 다섯 개는 끓여야지. 아직까지 셈이 안돼?"
젊은 여자는 잔소리가 싫지 않은지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1/n에 강한 MZ세대잖아요. 크크크"
내 발밑으로 남색 장화가 문 앞에 섰다. 문을 밀었지만 열리지 않자 대신 마대 걸레를 문 아래로 쑥 밀어 넣었다.
"바닥 좀 닦을게요. 물기가 많아서 나오시다 넘어질까 봐."
가만히 있어야 할지, 아니면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도 대답은 해야 할 거 같아서 작게 소리를 내려는데 남색 장화가 그새 옆 칸으로 사라졌다.
“지네 집 화장실도 이렇게 드럽게들 쓸까? 으휴 ”
“똥구녁 닦고 그대로 변기에 넣는 게 어려운가 왜들 바닥에 버리고 지랄들이야.”
“주미야, 문 입구에다 신문 더 깔어봐. 바닥 물기 있는지 자꾸 미끄러진다.”
남색 장화는 쉬지 않고 혼잣말을 했다가 누군가와 대화를 했다가를 반복했다.
그 사이 라면 수프 냄새와 함께 내 몸이 만들어낸 조형물의 냄새가 묘하게 어우러져 공기를 타고 흩어졌다. 지금 내가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라면의 냄새를 흐리는 정체의 주범이 나라는 걸 알리는 셈이다. 라면을 끓이는 사람은 누가봐도 확실하니 말이다. 나는 옷 입는 소리조차 낼 수 없어 그대로 몇 분을 변기에 앉아 있었다.아, 찝찝하다.
그 때, 옆 칸 문을 잠궜던 자물쇠를 여는 소리와 동시에 또한 사람의 요란한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여 다 싹 준비했데이. 주미야 냄비 갖고 온나!"
“뜨겁습니다. 빠방! 비키세요! 라면 들어갑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라면에 들어간 계란처럼 다른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
"저 가시내 참말로 물건이다. 물건."
한명의 여자가 젊은 여자를 칭친했다.
여자 셋은 서로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지만 다들 하나같이 빨리 먹고 갈란다며, 자리를 양보하는 소리가 칸막이를 타고 들려왔다.가벽 하나 사이로 호로록하며 면을 넘기는 소리와 쩝쩝거리는 소리에 나의 얼굴은 붉어졌다 하얘졌다 노래졌다를 반복했다. 창피해서 붉어졌고, 들킬까봐 하얘졌고, 시험에 늦을까봐 노래졌다.
“주미, 저 가스나 들오고 나서부터는 클린용역에 아주 그냥 생기가 돈다 안 카나. 하하.”
“진짜요? 여기 오니까 저는 맨날 칭찬만 받네요. 딴 데서는 고졸이라 하는 짓도 고졸같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여기는 저랑 완전 찰떡! 호호.”
주미라 부르는 여자를 제외한 여자 둘은 주미에 대한 칭찬과 함께 일하는 다른 직원들의 뒷담화를 정신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대화 끝엔 "부모가 돼서 자식한테 민폐 끼치지 말아야지"였다.
"주미 느그 엄마는 너한테 민폐 안 끼치제?"
"저희 엄마요? 제가 지금 스물일곱이니까 9년째 저한테 민폐 끼치고 있는데요?"
"뭐라꼬? 이긴 또 뭔 소리고."
"저 고 3 때 엄마가 치매 왔거든요. 알콜 치매."
정적이 흘렀다.
"제 꿈은 제 자식한테 민폐 안 끼치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도 안 할라고요."
"문딩 가시나. 그렇다고 결혼은 와 안하노!"
"제도 엄마 닮아 똥은 끊어도, 술은 못 끊어든요. 하하."
"에헤이. 느그 엄마가 참말로 니한테 억수로 좋은 거 물려줬다. 젊은 니 인생이나 늙은 우리 인생이 아주 개똥이다 개똥. 화장실에서 라면이나 끼리먹고."
"근데, 그래도 엄마가 나한테 민폐 끼쳐도 되니까 저 철들 때까지만 사셨으면 좋겠어요."
세명의 여자는 말없이 다시 라면을 먹는 데 집중했다.
라면을 끓이는 데는 10분, 먹는데 10분, 치우는 데 2분. 세 명의 여자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불과 12분까지만 해도 식당이었지만 알싸한 락스 냄새와 함께 라면 냄새는 사라졌다.
버스타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 화장실에서 조금만 빨리 나와도 버스 타고 갈 수 있었는데 결국 택시비를 버리고 말한다. 택시 안에서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 내가 시험만 붙으면 나한테 마음껏 민폐 끼쳐. 알았지? 약속!
하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합격도 못하고, 엄마를 먼저 떠났으니 말이다.
나는 5번 출구 옆 화장실로 가보았다. 오후 작업이 시작되어 흩어졌는지 아무도 없었다. 잠겨 있는 청소 도구함에는 대 걸레가 거꾸로 걸려 있었고 세정대 위 선반엔 신라면 세 팩과 휴대용 가스버너, 김치통, 그리고 도시락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때 먹었던 라면도 아마 신라면일테지. 출입구 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원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75리터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이런 데 저렇게 젊은 사람도 일을 하는구나?’
그녀는 가득 찬 70리터 쓰레기봉투를 구석으로 던지더니 라디에이터 위에 걸터앉아 크게 숨을 쉬었다. 거거익선이라고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한테는 봉투가 클수록 싸고 편리할지 몰라도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한테 대용량 쓰레기봉투는 쳐다만 봐도 허리 통증이 밀려드는 고통이었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땀과 먼지가 뭉쳐 들러붙어 있었고 겨드랑이에는 하얀 소금 선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주미야! 거 쓰레기 퍼뜩 갖고 나온나!"
주미? 아, 그 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리고 앳된 얼굴이었다. 주미는 똥과 오물이 묻은 휴지가 가득한 70리터 쓰레기봉투를 들고나갔다. 꾹꾹 눌러 담았지만 묶어 놓은 틈 사이로 휴지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아우성을 쳤다. 주미는 망설임 없이 손으로 휴지를 집어 들어 다시 비닐에 쑤셔 넣었다.
적당히 게으름을 피워도 될 것 같은데 참 성실하다.
'여사님, 다녀오세요.'라고 말하고는 주미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와 파란 물통을 들어 걸레 세정대에 올렸다. 엇,물통 바닥에 노란색 종이가 달랑거린다. 반은 젖고 반은 마른 5만 원이다. 주인 없는 돈은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돈의 주인이셈!
"5만 원이면 많이는 아니어도 엄마랑 고기 3인분 정도는 먹을 수 있겠지?"
그녀에게 작은 기쁨을 주고 싶다.
하, 그런데 주미에게 오만 원을 줄 방법이 없다. 고개를 숙이며 방법을 고민하는데 바닥에 떨어진 비누를 발견했다. 아마 누가 쓰다가 떨어뜨린 모양이다. 비누와 넘치는 물이라.... 나는 반신반의하며 세정대에서 흘러내리는 물결을 따라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내 몸을 따라 물줄기가 만들어지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흘러갔다. 오? 신기한데? 나는 물이 비누가 떨어져 있는 곳까지 닿기 위해 있는 힘껏 스트레칭을 해 몸을 최대한 늘려 보았다. 사람이든 귀신이든 키는 크고 구실을 한다는 걸 새삼 알게 되는 순간이다. 나는 그녀의 발 앞 비누를 위해 죽을힘을 다해 몸을 늘렸고 내 몸 타고 흐른 물줄기는 마침내 비누를 건드리며 미끄러지더니 그녀의 발밑까지 닿았다. 바닥을 보지 않은 채 발을 땐 그녀가 무심하게 비누를 밟았고 그대로 나자빠졌다.
'오케이. 생각대로 되는군.'
물통은 뒤집혔고 오만 원은 그녀의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손으로 엉덩이를 감싸 쥐던 그녀는 얼굴을 찌뿌리다가 물 통에 붙은 5만 원을 보더니 잇몸을 만개하더니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뻗었다.
“아싸!”
웃는 모습도 참 예쁜 그녀다. 아프게 게 한 건 좀 미안했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주미씨, 학교 다닐 뗴 소탐대실 배웠죠? 이런게 소탐대실이에요. 엄마랑 고기 사 먹어요!'
내 말이 들릴 리 없겠지만 난 간절히 외쳤다. 근데 역시나 안들리나 보다.
“흐흐. 웬 공돈! 이걸로 네일 받아야지. 아니다, 여름도 오는데 페디 할까?”
그러고 보니 보석이 손톱마다 박힌 가짜 보석이 눈이 부시다.
'뭐 어째, 너좋은 거 하세요! 네일이면 어떻고 페디면 어떻습니까. 불법만 아니면 되지요.'
주미는 무릎이 아픈 것도 모르고 신나게 변기 물을 내리며 청소한다. 신사임당도 신이 나셨는지 주미의 뒷주머니에서 얼굴을 실룩실룩거린다. 신사임당도 인정한 착한 일을 내가 해낸거다!
그나저나, 저승사자가 업으로 쳐줘야 할 텐데. 남의 돈가지고 생각내는 건 무효라고 우기면 내가 불리하긴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