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에 놓였을 때 화를 참지 못하고 가감 없이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신을 화나게 만든 사람들은 모두 예의 없는 ‘것들’이나 싸가지 없는 ‘것들’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게는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을 법한-예를 들어 찢어 죽인다, 젓갈 담가버린다. 기타 등등- 무시무시한 동사나 형용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3대가 멸할 저주를 내뿜는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자면 그런 쌍욕을 먹을 만큼 잘못한 일을 했는가, 저 정도의 분노를 표출할 만큼 위협적인 행동을 했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동시에 느끼는 건 그런 분노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당신의 예의와 질서와 배려는 충만한가, 하는 의문감과 아무 관계없는 나까지 옆에서 듣고 있다는 이유로 저 3대가 멸할 저주를 받고 있는 욕받이가 되는 것 같아 나까지 괜한 분노가 생긴다.
사람은 처한 입지가 좁으면 좁을수록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빠지기 쉽다. 좋은 사람이라는 근거는 비슷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근거는 제각기 다 다르다. 나에게 좋은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나에게 나쁜 사람이란 나랑 맞지 않거나, 나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거나, 나를 배려하지 않거나, 나의 마음을 몰라주거나, 이것도 아니면… 그냥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다 나쁜 사람이다.
어른이라 불리게 되는 나이에 익숙하게 되면 단단한 부분은 더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약한 부분은 더 약해진다. 단단해진 부분은 세게 건드려도 크게 동요하지 않지만 약한 부분은 아주 조금만 자극해도 움찔거린다. 그 움찔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분노일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약한 부분을 공격받으면 본능적으로 먼저 방어기제를 작동하게 된다. 문제는 이 방어기제가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도 되지 못하고 타인에게 불쾌함만 주는 경우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짜증유발의 방어기제 중 몇 가지를 꼽자면 ‘나 때는 말이야!’, ‘너 몇 살이야?’, ‘근본도 없는 주제에.’
분노는 근원적으로는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오는 불쾌함에 대한 결과물이 테다. 어떤 감정이든 쌓아두지 않고 표출하는 게 건강한 것이라면 분노 역시 감정이니 분노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이 뇌에서 입으로 전달되기 전까지 최소 한 번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오는 것이라면 당신의 분노는 그저 욕받이 혹은 감정 쓰레기통을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일 수 있다. 게다가 그 분노 대상과 이유가 분명한 불만이 아니라, 이유도 대상도 없는 그저 분노를 위한 분노라면 사람들로부터 인격 부재자(대개는 이러한 사람을 인격장애라고 부르지만 이런 사람들한테는 장애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장애는 옳고 그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그냥 인격이 없거나 결핍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다)는 오명은 옵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