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김지영 영화를 보고
82년 김지영
워낙 책이 극사실주의였던 탓에 영화도 비슷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겠거니, 하고 본 영화.
뭐, 을마나 대단하다고 다들 울고 그러나 싶었는데 시작 오 분만에 훅 하고 올라오는 울컥함.
아이를 낳고 하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눈물로 밥 말아먹은 기억.
애기 우는 소리가 행여나 이웃에게, 출근하는 남편에게 방해가 될까 새벽에 유모차를 끌고 나가 해도 안 떠 하늘이 시퍼렇던 공원을 돌아다닌 기억,
애 봐줄 사람이 없어 애를 업고 학교 연구실에 가서 입에 젖병 물려 재워두고 수업에 갔던 기억.
나도 일을 하고 싶으니 6개월 만이라도 육아휴직을 내보라는 말에 그럼 자기는 집에서 하루 종일 뭐 하냐고, 네가 나가면 얼마나 벌 수 있겠느냐며 걱정했던 남편의 기억.
죽기는 싫어서 병원에 찾아간 나에게 그래도 좀 견뎌보지, 약 먹으면 계속 먹으라고 할 텐데,라고 말했던 남편, 그때 왜 그렇게 말했었냐고 물어보면 정말 몰라서 그랬다는 남편.
엄마 닮아 애가 별나다고, 엄마가 힘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옆에서 가만히 서서 안쓰럽게 지켜만 보는 남편.
아이를 사랑하고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 내 인생 전부와 등가로 교환될 수는 없다. 나라는 개인은 엄마, 배우자, 딸, 사회 구성원 이하 등등 수많은 부분의 합으로 만들어진 총체적 합인데, 사회는 그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이건 선택이 아니라 포기에 가깝다)하는 것이 모두가 행복한 길이라는 명분으로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혹 이것을 거부하면 아구지 꽉 다물고 어느 하나 빈틈없이 완벽하게 잘해보라(고는 하지만 니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겠다)는 싸늘함이 돌아온다. 이 싸늘함이 마치 진리라도 되듯이 혼자서 해결하지 못해 벽 앞에 머리를 박게 되는 날이면 나라는 인간은 누구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서는 하나도 해낼 수 없는 존재이구나, 남편의, 친정 엄마의,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하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여자구나, 라는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나라는 개인은 없고 이 사회에서 여자로서 해야 할 합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셀 수 없을 만큼 찾아오고 때로는 그 벽을 넘어서기도 했지만 그 벽을 넘어서면 더 높은 벽이 기다리고 있을 때가 훨씬 많았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현명한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온전한 내가 아닌 파편화된 나로 살아가길 요구하는 사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사는 사람이 제일 속 편한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고서 그 말이 불쾌하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기득권이 불평등을 논하고 역차별을 주장하는 이 사회. 권력의 발밑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힘을 소수의 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세상은 그들의 발밑에서 소리 없이 밀어내는 다수의 힘으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