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에 대하여

성인이 되어 시작한 첫 경제 활동 이후 지금까지 나의 경제활동의 98%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선배의 소개로, 선생님의 소개로, 친구의 소개로, 친구의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일자리를 얻었던 덕분에 원하는 곳을 수소문하여 찾아가는 수고나 거절당하는 경험은 또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아무래도 전문성을 띠고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대개 맡은 일들은 TF팀처럼 정해진 업무가 있고 그 업무를 완수하면 흩어지는 일회성 프로젝트이거나, 일회성이 아니더라도 짧은 계약 기간(대개 3개월이고 길어야 1년이다)동안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능력과 수준이 보장된다는 근거 아래 인맥으로 진행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때 나는 나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돈보다 훨씬 중요했다. 얼마나 멋진가. 거절당하지 않는 삶이라니. 내가 뭐라고!



아무튼 나는 소개를 통한 경제활동을 덕분에 대학원 등록금으로 교체될 인건비를 떼어먹는 일이나, 몇 달 개고생 해서 이뤄놓은 결과물을 아마추어 수준이라며 도매급으로 가격을 후려쳐 받은 경험도 거의 없었다. 나를 소개 해준 사람의 면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미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고용주는 알고 있었던 탓에 특별한 문제점이 없는 이상 나는 그쪽에서 원하는 기간만큼 일을 하고 그만큼의 임금을 받았다.



마흔이 되고 내가 요즘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거절당’하는 일이다. 십 년 동안 업으로 삼았던 강의를 접고 학교를 나와 본격적인 인력시장에 나의 포트폴리오를 내놓은 지 기껏해야 몇 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의 조급증은 적당히 맞는 조건만 찾았다 싶으면 아무 대나 우선 밀어 넣게 나를 쫀다. 사실 맞는 조건을 찾는 것부터가 보이지 않는 거절의 시작이자 연속이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내가 가진 외부 조건(나이, 기혼, 육아, 지방러, 기술 자격증 무, 실무 경험 무 등등. 공부만 한 것의 대가는 생각보다 크더라. 물론 학업을 하면서도 다양한 능력을 겸비한 사람도 많다. 핑계지만 현실을 외면한 대가라고 해두자::)이 보편적이지 못한 것도 이유고, 사회가 원하는 멀티플레이어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내 능력도 이유가 될 것다. 그런데 사실 이것만큼이나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건 열정 페이조차 주지 않는 악덕기업이란 게 뻔히 보이는 데도, 누가 봐도 가'족'같은 분위기를 빙자한 교활한 기업이란 게 훤히 보이는데도 '한번 지원해볼까?' 하는 줏대 없이 흔들리는 내 마음과 처지다. 분명한 건 프리랜서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급증일 테다.



온라인 구직사이트에 매일 접속하고 '00님에게 꼭 맞는 채용 정보가 도착했어요.'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게 일상의 일부가 된 요즘이지만, 그리고 천차만별인 지원 양식, 저마다 요구하는 것이 다른 서류, 조급한 지원 마감 날짜 등이 나의 간과 심장을 쪼그라들게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기대감이 거절의 두려움을 이긴다. 그러면서 나를 알리기 위해서는 인력 자본주의 시장에 내 존재를 드러내며 내가 여기 있다고 크게 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뭐...역시는 역시인가. 발표 날짜가 훌쩍 지나서야 내가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듯 거절 총량의 법칙이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나는 미리 당했어야 했을 거절을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좀 편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안되면 안 됐다고 연락이라도 줬으면, 문자 한 통, 메일 한통이라도 주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대부분의 곳은 아예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고, 내가 떨어졌는지 붙었는지조차 모르는 게 제일 답답한 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스무 곳 넘는 기업에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지만 어느 한 곳이라도 내 이력과 내 글을 봤다는 건지, 안 봤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별로라는 건지 말을 안 해주니 도대체 알 수 없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건 ‘내가 서류를 잘못 넣었나? 뭘 누락했나? 핀트가 안 맞았나?’와 같은 구조적인 실수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만 그래 봤자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력의 바운더리 안이다. 거절은 내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걸 자꾸 망각하면 안 되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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