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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헤치지 않는 연애

연애 에세이 <딸아, 연애를 해라>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서로 느끼는 불편함이나 불합리함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함이다. 나의 분노와 불쾌함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서로에게 상처 주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오직 나만 중심에 두겠다는 것과 같다. 이는 이별로 가는 지름길이다.
-류수연, <딸아, 연애를 해라>, 148쪽

연애를 결혼의 완성물이라고 말했다가는 꼰대로 불려도 싸다 싶을 만큼 바야흐로 ‘연애 우위의 시대’다. 물론 예전이라고 해서 자유연애를 외치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연애와 결혼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불과 십몇 년 전까지도 연애에 소질 좀 있는 여자는 ‘까진 년’, ‘색녀’, 심지어 ‘걸레’라는 별명이 붙는 걸 감수해야 했지만 요즘은 공부 잘하는 애가 연애도 잘한다는 칭찬이 붙기도 하고 연애 잘하는 방법이나 연애에 필요한 깨알 팁을 담고 있는 콘텐츠들이 넘쳐나고 불티나게 팔린다.

중요한 것은 연애가 이제는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연애가 곧 목적이 되면서 반드시 연애에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벼워졌고 결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연애 상대자가 결혼 상대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의 전환은 연애 대상의 선택 폭을 훨씬 넓게 만들어주었다. 다양한 직군,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외모, 되도록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곧 연애의 미덕인 세상이 온 것이다. 이런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하면 내가 너무 까진 년인가. 시대가 주는 연애의 자유를 즐긴다는 이유로 ‘까진 년’라는 프레임을 써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가 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연애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다는 이유로 예전보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쿨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좋아하지만, 같이 있고 싶기는 하지만 책임지기는 싫어서 썸이라는 말로 어물쩍 관계를 뭉개거나 어장 관리를 잘하는 것이 자유로운 연애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심각하게는 감히 나보다 먼저 이별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사랑을 나누었던 추억을 협박 수단으로 악용하거나 상대의 폭력이 두려워 함부로 이별을 말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며 죽어가는 연애를 연명하는 사람도 있다.


연애 고민 어플에 이런 상담이 올라왔다.

“관계 중에 남친이 제 뒤에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길래 카톡을 확인하는 줄 알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그래서 뭐하냐고 물어보니 얼버무리면서 핸드폰을 집어넣더라고요. 사진 찍은 거 아니냐고 제가 막 따져 물었지만 아니라고 잡아떼길래 그럼 핸드폰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절대 보여주지 않았어요. 혹시 카메라로 제 몸을 찍은 건 아닌지 정말 불안해 죽겠어요.”


이 고민에 대한 수십 명의 조언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건 이러한 상황이 특수하거나 극단적인 고민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사랑의 행위가 범죄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 건 정말로 한 끗 차이라는 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 대가가 협박과 공갈로 돌아온다면, 누가 감히 함부로 사랑을 그리고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연애는 머리와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는 사랑을 드라마 아니면 유튜브, 그것도 아니면 커플 매칭 앱으로만 배운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럼에도 <딸아, 연애를 하거라> 핵심이자 전제는 연애를 ‘해야 한다’는 데 있다. 단, 너를 위한 연애를 해라. 너를 해치지 않는 연애를 해라. 연애는 두렵고 어렵지만 연애를 해서 얻는 것은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많고 인생의 깊이 역시 달라지게 되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연애를 해라.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까?’라는 속담이 있다. 구더기 생길 게 두려워서 만들지 않으면 맛있는 장 한번 먹지 못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실패하는 연애가 두려워서 사랑을 못할까?’ 실패가 두려워서 연애조차 하지 않으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만큼 큰 기회비용은 없다. 이 책은 맛있게 장을 담그는 법, 그러니까 짜짠~하는

연애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집집마다 비법이 다르듯이 연애의 비법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일괄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구더기가 안 생기게 하는 방법은 알려준다.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알려준다. 거기에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엄마의 마음을 담아.

연애를 해야 너를 알고, 타인을 이해하고, 너와 타인을 모두 해치지 않고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을 것이야, 라는 게 이 책이 딸에게 주는 메시지다.


연애는 별책부록이라기보다 색인에 가깝다. 연애 색인 가운데 우리가 지난 연애에서 배운 배려와 존중이라는 카테고리는 결혼 생활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딸아, 연애를 해라>,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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