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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법이 필요한 이유

-법이란 선이 아닌 악을 범하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것

고등학생인 C는 같은 반 아이들을 괴롭히는 D와 실랑이를 벌이다 D를 밀쳤도 결국 큰 폭력 싸움으로 번졌다. 그 과정에서 D가 의자로 C의 얼굴과 가슴을 내려치는 바람에 C는 코뼈와 갈비뼈가 부러졌고 학업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 사건이 벌어진 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C는 수술과 치료를 반복중이다. 원래대로였다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야 했지만 그 꿈은 언제 이루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본 C의 엄마는 슬픔을 넘어 분노로 가득 찼고 법의 이름으로 가해자 D를 소년원에 집어넣는 것만이 C와 가족이 고통 받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이며 가장 합당한 응징이라고 생각했다.

유능하다는 변호사들를 만나고 상담을 받았지만 유감스럽게도 C의 엄마의 바람과 달리 돌아오는 대답은 엄마가 원하는 처벌은 대한민국 법이 존재하는 이상 그런 판결은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 차라리 피해보상을 최대한 많이 받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 아이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병원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기만 하며 평범한 일상조차 지내지 못하는데 가해자 D는 처벌로 강제전학을 당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망각한 채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이 담긴 SNS 사진을 보는 순간 C의 엄마는 살의가 느껴졌다. 내 자식을 반병신으로 만든 저 D는 왜 잘 먹고 잘 지내야 하는가? 왜 법은 공평하지 못한가. 남에게 피해를 준 만큼 처벌을 받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가. 그게 왜 불가능하다고 법은 말하는 것인가.


아무리 위로해도 참담함을 평생 지고 살아야 하는 C와 C엄마의 마음을 당해보지 않은 이상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고통이 오로지 아이와 부모의 몫이 되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어떻게 법이란 것은 단 하나도 피해자의 마음을 위로할 만큼의 처벌조차 내리지 않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불공평한 법이 아닌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함무라비법전은 익히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법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법이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의 의미로 해석 한다. 그러나 단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만큼 응징 또는 복수한다는 의미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받는 만큼 돌려주고, 맞은 만큼 때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를 뺏기면 두개를 뺏는 것, 누군가에게 피해를 받았으면 그것보다 몇배로 응징하고 싶은 것이 본성이다. 실제로 살다보면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하나만큼 되찾아오는 것이 공평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로 상태는 누구에게도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해했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리 선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받은 상처보다 더 해하여 고통을 주고 싶은 마음은 지극히 본능적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순간 피해자는 역으로 가해자가 되고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은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실제로 응징이나 복수가 내가 당했던 것과 동량, 동질로 행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거니와 그렇게 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결국 폭력은 그 의도가 악에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처럼) 결과적으로 더 강하게, 더 세게, 더 잔인하게 극단적으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원칙을 적용한 법이 바로 “눈에는 눈(만), 이에는 이(만)이란 해석이 법의 정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법은 공평을 보편적 기준으로 삼아 판단한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법은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험에 빠뜨린 상대를 법의 심판대에 세워 응징하겠다는 각오로, 내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겠다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법에 의지한다

그러나 법원의 결과가 나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반대로 예상하지 못한 나쁜 결과가 나왔을 때 그 참담함은 아마도 아직 경험한 바 없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학폭의 피해자 엄마가 가슴에 품고 있는 복수심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 마음을 함부로 손가락질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엄마의 바람대로 가해자가 소년원으로 가지 않도록 만든 법은 좋은 법이 아니라고, 공평하지 못한 법이라고 판사를 비난하거나 법의 수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반복된다면 법은 본래적 기능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법은 인류애로 판단하는 것도,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도, 분노의 양으로 조절하는 것도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법이 어려운 이유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준 사건조차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단과 처벌이란 너무나 주관적이다. 이 모든 결정은 신이 아닌 인간이 해야 하기 때문니다 그러니모두에게 만족을 안겨주는 판결이란 지극히 이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법정 안에서 인류애와 법의 논리는 분명하게 다른 결이다.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이다.


아이의 일상을 망쳐버린 D를 소년원에 보내고 싶다는 피해자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 바람을 들어줄 수 없는 건 법이 있기 때문이다. 법이 그녀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는 건 그녀의 바람이 법이 가지고 있는 정의 원칙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해에 대한 보상이 또다른 가해가 되서는 안 된다는 원칙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법이란 전혀 공평하지도, 정의로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법은 가해자에게 변명 거리만 제공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이 때로는 우리는 절망하게 하지만 적어도 이성을 끈을 붙잡을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법이다.



법은 우리의 억울함을 완전하게 풀어주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를 본성이름 이름의 악으로부터 지켜주는 최전선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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