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말씀)을 지키는 방식을 두고 벌이는 대립은 누구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그 의도는 선할 지라도 결과는 악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신의 말씀을 공통분모로 두고 인간이 하는 화해와 치유는 그 어떤 것보다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
선행과 악행을 구분하는 기준은 신의 뜻에 있지 않고 인간의 판단에 있다. 오로지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느냐에 따라 악행이 되기도 하고 선행이 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는인간의 이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과거 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극을 안겨준 슬픈 경험을 갖고 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모든 결과에 대해 신의 뜻이나 이름을 앞세워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일체 거부한다. 또한 자신의 행동을 함부로 신의 뜻이라 높이거나, 반대로 자신의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고 해서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신의 권위와 이름을 빌려 자신의 부끄러움을 포장하는 것이야말로 신을 모독하는 일이기에.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비종교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비종교인은 곧 무신론자와 동급으로 취급된다. 지금껏 내가 들은 비난 중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종교를 갖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언제부터 부모라는 존재와 종교가 늘상 붙어 다니는 관계였던가.
어쨌든 비종교인인 나는 신은 있다고 믿지만 이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특정 종교를 동반해야 한다는 생각엔 동의하지 않는다.
보통 나는 인간의 힘으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에너지를 느낄 때 신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신이 내 의지를 좌지우지하거나 내 의지에 앞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신이란 존재는 소원을 이뤄주는 지니도, 내 선택과 행동의 결과에 대해 상벌을 주는 심판자도 아니다. 나에게 신이란 그저 존재 위의 존재라는 의미보다 세상을 수용하는 태도로서 의미가 더 강하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나는 그 신의 모습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정말 신일뿐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인들은 신의 모습, 출신, 성별과 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로 믿음을 구분하고 분류하고 비난한다. 신이 아버지면 어떠하고 어머니면 어떠하랴.... )
내가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번째는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의 소망을,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스스럼없이 “그것은 내 뜻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고 선언하는 태도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의 의지를 신의 명령, 신의 부름이라고 확대해석하곤 한다.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개인의 소원은 신의 이름을 빌린 덕분에 신탁으로 격상되고, 그러면서 덤으로 얻은 사명감은 에너지가 되어 일체의 행위에 대해 거침없게 만든다.
이것과 유사한 예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신께서 당신을 구원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친구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종교적 공간을 방문한 사람에게 “신께서 당신을 여기로 인도하셨습니다.” 라며 격하게 환영하는 사람, 누구도 그를 결코 용서한 적이 없건만 “신은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라며 세계의 평화와 용서를 외치는 범죄자들을 꼽을 수 있다.
게다가 일부 종교인들은 자신의 행동과 의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두고 모두 하나님을 따른 대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돈이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신의 뜻에 따라 충실히 행동한 대가이며 믿음의 결과다. 물질적 빈곤은 신에게 더 충성하지 못한 부족함의 결과이며 신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잘못된 행위의 대가이다. 그러나 더 신실하게 신을 믿으면 언제가 그분은 나에게 응답을 주신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서 신의 응답이란 곧 물질적 풍요다. 그런데 그 어떤 신의 말씀을 찾아보아도 부의 척도가 곧 신이 내린 은혜의 척도에 비례한다고 이해될 만한 구절은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종교인들에게는 참 쉽게 적용되는 예인 듯하다.
십 대 시절 내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신년 목표로 “백만 원을 십일조로 내는 신도가 백 명이 되는 해”로 삼았었다. 다들 알겠지만 십일조는 노동의 기쁨과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해 자기 수입의 1/10을 신께 바치는 헌금이다. 그런데 백만 원이라는 십일조를 내려면 한 달에 천만 원이라는 수입이 있어야 한다. 목사님의 목표에는 결국 한 달 월급이 천만원인 사람들을 신도로 영입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일은 십년도 더 된 일인데 당시 월급 천만 원은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액수다.) 왜 이것이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목사님의 목표는 내가 비종교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또 하나, 사람들은 불리할 땐 원인론, 유리할 땐 결과론을 이용한다. 내가 가장 많은 겪은 종교인들의 공통적 태도는 대개 이런 식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때, 결정에 대해 자신이 확신이 서지 않을 때 "길고 긴 기도 끝에 내가 드디어 신의 응답을 받았어!"라고 말하며 결론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참 답답하다. 어디까지나 결정은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결정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신에게 돌림으로 해서 마치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는 개인의 어떤 의지도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진짜 의도는 무엇인지. 나는 그 말이 마치 책임에서 멀어지려는 면피 같기만 하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신이 자신을 그렇게 이끌었다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은 또 한 번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과가 좋으면 자신이 신의 명령을 잘 따랐기 때문이며, 결과가 좋지 않아도 그 역시 신의 선택이라고 말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수용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신의 뜻은 이미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기반성이 놓일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신의 뜻에 어찌 미약한 인간이 함부로 자기반성을 들이댈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을 모두 차치한다고 쳐도 적어도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신의 부름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최소한 이기적이거나 모순된 태도는 보이지 않아야 하지 않는 게 맞는 거 아닐까. 그 어떤 신도 이타를 강조했지 이기를 강조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내가 생각할 때 신이 주신 가장 큰 선한 영향력은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희생을 감수한 수많은 주체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몸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존재를 늘 돌아보고 반성하고, 모든 만물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종교의 기본 원칙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가 으리으리하게 건물을 지어 집단을 만들어 이를 ‘신의 뜻’이라 쓰고 ‘부와 권력’이라고 읽는 종교인들을 보면 언제간 그들이 “내가 곧 신이다”라고 말할 것만 같아 참...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