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밥을 다 먹었다고 일어나는데 밥그릇을 보니 여기저기 밥풀이 묻어 있고 영 깨끗하지가 않다. 아이를 불러 깨끗하게 먹으라고 말한다. 이 쌀 한 톨이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고생이 들어가는데! 하는 말과 함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리 없는 아이는 그저 잔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작년 봄쯤에 아이의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다. 딱히 장난감이랄 것도 없는 집이다 보니 먹을 것 다 먹고 놀 것 다 놀고도 할 게 없는지 애들이 뭐할까를 연신 토론한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렇게 심심하면 집 뒤에 있는 논두렁이나 걸으면서 냉이나 캐오라고 말했다. 그래도 한번 해봤다고 딸은 맞다! 그거 하면 되겠다, 를 외쳤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눈치다.
"논두렁이 뭐야? 냉이가 뭐야?"
그제야 나는 아이들이 논두렁과 냉이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부분의 도시 아이들은 벼가 어디에서 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지 못한다. 무식해서 그런 게 아니라 무지해서 그렇다. 왜냐면 논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쌀은 알아도 벼가 무엇인지 모른다. 자기가 먹고 있는 채소가 나무인지 줄기인지 잘 모른다. 그저 엄마가 먹으라고 하니 먹는 거고 먹으면 키가 크고 튼튼해진다고 하니 꾸역꾸역 먹어준다. 하지만 채소는 언제 먹어도 맛이 없다. 맛이 없으니 애정이 생길 리가 없다.
소비자와 생산자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유통 관계가 복잡하고 객관화될수록 소비자가 상품에 대한 감정이나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쌀 한 톨에는 농부가 피땀이 들어 있다는 말은 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공염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솔직히 밥을 먹으면서 식탁에 놓인 식재료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기란 꼰대가 라테 찾는 수준이다. 농약으로 포장한 칠레산 포도를 먹으며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칠레에 사는 이름 모를 농부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게 가능할 일이나 하겠는가. 어른이라고 다르지 않을 텐데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을 테다. 지금보다 기계화가 더 보편화된다면 식재료에 공급에 대한 감사함은 AI의 몫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나는 아이들을 대동하고 논두렁 답사를 실시했다. 이제 막 언 땅을 뚫고 싹을 틔우는 냉이를 캐는 것을 목적으로. 역시나 논도 논두렁도 처음 보는 애들이 하물며 냉이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잡초 반, 냉이반이다. 그래도 쉬지 않고, 힘들단 말 하지 않고 논두렁 사이를 뛰어다니며 “여기 냉이 있어요!” 하고 부른다. 네가 직접 캐보라고 하니 움찔한다. 손에 흙이 묻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듯하다. 엄마가 흙장난하지 말랬다는 말을 아직까지 잘 지키는 중이다. 그래서 캐는 건 내가 할 테니 냉이 찾는 건 니들이 하라고 다시 작업에 돌입한다. 그렇게 우리는 바구니 하나를 금세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 냉잇국을 끓인다. 슴슴하게 끓이면 밥 없이도 맛있게 먹을 수 있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직접 캐 온 냉이 맛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한 그릇씩 덜어주고 먹어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잘 먹질 않는다. 냉이의 독특한 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캘 때 묻은 흙이 자꾸 생각이 나는지 왠지 못 먹겠단다. 깨끗하게 씻었다고 해도 쭈뼛쭈뼛 거리며 먹는 게 시원찮다. 니들이 안 먹으면 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했다. 그랬더니 애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꾸역꾸역 먹는다. 괜히 체하면 골치 아프니까 “굳이 안 먹어도 돼.”라고 하니 “안돼요. 버리면 아까워요. 어떻게 캔 건데”
이 냉잇국이 과자였어도, 아이스크림이었어도, 사탕이었어도 꾸역꾸역 먹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정의 형태는 전혀 다르지 않았을까. 맛은 없지만 애정이 든 냉이는 차마 버릴 수는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논두렁을 걸어 다니면 찾은 냉이인데! 비로소 애정이 맛을 이기는 순간이다.
생산과 소비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거기에는 감정이 들어가게 된다. 즐거움, 힘듦, 고통 등이 자연스럽게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아이들은 생활의 편리함을 누리는 대가로 이런 감정을 느낄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아까운 건 버려지는 냉이뿐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느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아이들의 감정이다.
아이들이 세상 즐거운 스마트폰을 열심히 하다가도 어느 지점이 되면 지겹다고, 스마트폰도 심심하다고 외치는 이유는 스마트폰이라는 생산자와 아이라는 소비자 사이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애정이 생기면 없던 맛도 생겨나듯이 아이들의 감정을 불러내고 풍부하게 하려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와 폭을 넓혀 주어야 한다. 경험을 통해 감정을 느끼고 감동하면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돈 주고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애정이 생기고 먹으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먹게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