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체에 돈을 정기적으로 보내거나 전달하는 방식의 기부나 후원은 하지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의심이 많은 성격 탓에 전화나 계좌이체로 하는 기부나 후원은 말 그대로 남 좋은 일만 해주는 것 같다.(지극히 편협적인 사견이니 오해 마시길)
특히 사랑의 열매, 적십자, 유니세프 거대 비영리단체 등이 한 짓거리를 보고 있자면 저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단체조차도 양아치 같은 짓을 하는데 비영리를 앞세우며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는 후원 단체들이라고 뭐 얼마나 다를까 싶은 의심이 점점 강해진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전, 기관에 다녔을 때 해마다 한 번씩 ‘사랑의 빵’ 저금통을 받아오거나 아프리카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지가 담긴 봉투를 가져오곤 했다. ‘사랑의 빵’ 저금통은 일정 기간 동안 잘 채운 후 다시 원으로 가져가면 관련 후원단체에 한꺼번에 보내는 방식이었다. 아직 용돈이란 개념조차 탑재되지 않는 유딩들이 무슨 수로 저 저금통을 다 채울까 싶었다. 결국 털리는 건 내 지갑이었다. 몇 번 동전을 주기는 했지만 뭔가 찜찜했다. 동전이 생길 때마다 저금통에 넣으라고 말하는 건 기부의 원래 의도에 맞지 않을뿐더러 남은 동전이 곧 기부라는 도식도 썩 유쾌하지도 않아(동전이 하찮다는 게 아니라 쓰고 남은 동전이 생기면 (이왕 쓰는 거) 기부한다는 방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다) 유감스럽지만 유치원으로 ‘사랑의 빵’ 저금통을 다시 돌려보낸 적은 없다.
또 하나 편지 쓰기 행사의 경우 아이들이 직접 쓴 편지나 그림을 수합한 후 아프리카로 보낸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정말 아프리카행인지 아니면 재활용행인지 그 과정이 안내되어 있지 않았기에 편지를 쓸지 안 쓸지를 아이의 의지에 맡겨버리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편지는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못하고 그냥 재활용장에 넘겨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전국 유치원에 보내진 편지지를 모두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실는 건 낭비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이 모두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편지 옆에 정기 후원 계좌번호 또는 기부자의 수고로움을 줄여주고자 아예 자동이체 시스템이 있으니 사인만 하시면 된다는 문구가 괜히 얄밉다는 사실이다. 편지는 아이가 쓰고 돈은 엄마가 내는 이 묘한 시스템을 아이는 어떤 의미 인지나 알고서 기부 문화를 학습받을까
몇 년 전부터는 소속을 알 수 없는 단체들이 길거리에서 의식조사라는 미끼를 던진 후 자연스럽게 부스로 유인하고는 기부를 제안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나도 당했다. 아이와 지나는 길에 한 사람이 아프리카 친구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품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하고 있으니 스티커 한 장만 붙여 달란다. 아이는 신나게 붙인다. 그 사이 나는 홀린 듯 부스에 들어가 후원 방식 설명을 듣고 있는다. 여기서도 역시나 납부 날짜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 편하게 기부할 수 있는 자동이체 시스템을 이용하란다. 나는 이 방식이 별로고, 내가 원하는 곳에 원할 때 해도 되냐 물어보니 그렇게는 안 된단다. 아이들의 후원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 최소 1년 이상의 정기후원만 가능하다고 한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깨끗한 물인데 이 물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최소 이만 원 이상의 정기적 후원이란다. 논리상으로는 이 말이 맞을지는 모르지만 이 논리를 주장하는 단체들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강요에 가까운 기부를 거절하고 돌아 나왔다.
자신들의 명분이 분명하다면, 행동이 정의롭다면 굳이 저런 설문조사/인식조사라는 꼼수를 부릴 필요가 있을까.
나는 기부라는 행위는 타인의 제안, 요구, 혹은 강요가 아닌 자연스러운 습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기부나 후원이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날에 하는 이벤트가 되거나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될 경우 기부라는 행위가 마치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이 뜻이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이러한 생각은 자칫 잘못하면 가진 (혜택을 누리고 사는) 내가 어렵거나 소외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수직적 사고를 무의식으로 갖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기부라는 행위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행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선한 행동이나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고 교육한다면 선행=칭찬이라는 메커니즘이 생기게 된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이러한 교육이 무의식적인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면 ‘돕다’는 행위에 주어로 항상 자신을 두게 되고 거기에 칭찬까지 더하면 스스로 우월한 사람, 특별한 사람이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봐서 안다. 누구에게 늘 도움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는 삶보다 민폐도 끼치고 도움도 받고 부탁도 하는 삶이 훨씬 많다는 것. 도움이란 one-way가 아니라 give and take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기부의 결과가 “특급 칭찬”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기부란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이익을 다시 사회에 돌려주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 개인이 불편함 없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내가 하지 않는 일을 누군가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고, 다 그만큼 돈 받고 하는 일인데 그게 뭐 고마운 일이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하기 싫은 타인도 하기 싫은 법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가 문제없이 잘 굴러가는 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누군가는 업으로 삼아 성실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익이란 물질적으로 보이는 것뿐 아니라 문제없이 일상을 지내는 것 역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수고로 얻는 이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나의 이익을 나 역시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것이 기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기부를 반드시 돈이나 물건의 형태로만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돈으로 하는 기부나 후원이 가장 간단하고 현실적인 방법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선택할 뿐이다. 이 걸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부의 본질이 훼손되는 건 참 씁쓸하고 또 답답한 일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