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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 당하는 연애

그는 자신의 가족을 사랑했고, 동료를 사랑했고, 애인을 사랑했다. 그 사랑은 안락하고 다정했지만 그의 눈길이 미치는 범위까지만 닿았기에 나는 고독했다. 내 세계는 이미 그의 눈이 닿지 않고 상상력이 닿지 않는 곳까지 걸쳐 있었으므로.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외면하는 게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마땅한 도덕과 개인의 노력을 들이미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지금쯤 그는 알게 되었을까. 사랑이 내 세계를 깨고 상대의 세계를 기꺼이 맞이하는 일이라면, 그 시절 그와 나는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홍승은, <당신이 계속 예민하면 좋겠습니다>중-

          

예전에 만났었던 S는 내 이야기를 참 잘 들어주었다. 잘 듣고 있다가도 “그건 말이야.”로 시작해 내 말에 오류를 찾아 친절하게 수정해주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대화의 마지막은 “내 말 이해했지?” 내지는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말아.”로 마무리되는 게 보통의 순서였다.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지만 참 어른스럽고 듬직했다. 나뿐 아니라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살갑게 챙겨 준 덕에 평판도 늘 좋았다. 그러나 그의 조언과 격려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선택적이었는데 그와 비슷한 환경, 비슷한 수준, 비슷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 한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고 실제로 내 뒤에서는 ‘남들은 모르는 매력이 있나 보지’라는 말을 돌기도 했다. 그는 가끔 어리고 몽매하여 세상 물정도 모른 채 날뛰는 망아지 같은 나를 사람 하나 만든다는 심정으로 연애를 하고 있다는 진심이 담긴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이런 농담마저도 좋았다. ‘아, 내가 이 사람에게 선택적 사랑을 받고 있구나.’ ‘보호를 받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를 만나는 동안 그가 동의할 수 없는 내 의견은 의견이 아니라 쓸데없는 고집이었고 고집을 부릴수록 나는 그와 다퉜으며 마지막은 대개 나의 사과로 끝났다. 사실 그의 단호함과 거침없는 그의 결단력에 내 생각과 주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내 생각은 늘 그보다 짧거나 모자란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틀렸음’을 두어 번 증명된 이후로는 나조차도 내 의지보다 그의 생각을 신뢰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고, 좋은 스펙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나는 행여나 그의 외부자가 될까 불안해하며 나 자신을 단속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나의 가상한 노력에 관계없이 가끔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은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어?”였다.      


계절이 바뀔 때쯤 ‘사랑의 매’로도 나를 길들이는 데 실패한 그는 결국 이별을 통보했다. 이유는 도대체가 시간이 지나도 철들지 않는 나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죽어라 인내하며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철이 없어 헤어지자니. 아마도 그에게 나는 사랑과 인정의 대상이 아니라 가르침과 개도의 대상이었나 보다. 처음에야 뿌리칠 수 없는 이성의 매혹이 우리 둘을 묶어놓았지만 1등 모범생이 꼴찌의 억울함은 죽어도 이해할 수 없듯이, 아무리 노력해도 꼴찌가 1등의 애티듀드를 따라잡을 수 없듯이 우리를 묶었던 매혹은 현실의 문제까지는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별만큼이나 슬펐던 건 돌아가야 할 이전의 내 세계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너무 빨리, 너무 많이 길들여진 탓에 나의 세계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그와 만났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혹은 상대가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조건들이 나보다 낫다는 이유로 내가 조금 더 희생하는 것이 효율적이겠단 생각을 한 번쯤은 할 수도 있다. 이해와 양보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생각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습관화될 가능성이 크다. 둘 사이에 놓인 외부적 조건은 극적인 계기가 있지 않고서는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양보와 이해는 늘 덜 가진 사람의 몫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고 쌓이면서 뭔가 불쾌하다고 느끼는 지점에 이르는데 그땐 너무 멀리 와서 원점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어서 포기하거나 미친년처럼 폭발하거나 둘 중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게 뭐가 나쁘다는 것인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 나를 버리면서 희생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데 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관계에 있어서 오는 불편함은 각자가 감당하고 견뎌내야 하는 몫이지 누구 한 명에서 몰아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유지되는 사랑은 미안함과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더 큰 희생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연애를 연명한다. 그러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그때서야 이 연애가 뭔가 잘못되고 있구나를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다른 세계를 모두 포기하는 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는 사람과도 오래 사랑하지 못한다.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다단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므로.      


*이 글은 네이버 <연애&결혼>판에도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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